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밀) 6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밀) 6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09.03 13:00
  • 최종수정 2019.10.0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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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가장 사랑한 곡식, 밀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내려 주신, 축복받은 일곱 가지 식물이 있다. 축복받은 일곱 가지 식물이란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꿀)를 뜻한다(신명기 8,7-8).

“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인류 최초의 작물, 밀]

인류의 역사가 250만년이라고 할 때, 249만년은 족히 수렵채취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이렇듯 인류 역사의 99.9%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닌 역사였다. 그러다 약 1만 년 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곧 인류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최초의 곡식이 밀이다.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이 발생할 수 있었던 건,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자라던 야생 밀 덕분이었다. 사람들이 야생 밀을 채취하며 수렵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9,050년경 ‘레반트’(Levant) 지역에서 인류 최초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반트 지역이란 역사적으로 가나안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좀 더 크게 보면 이집트, 가나안,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을 뜻하며, 이 지역을 하나로 엮으면 초승달 모양이 나온다. 가끔씩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바로 여기다.

인류는 농경을 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정착생활을 하며 한 곳에 모여 살았다. 이후 인류는 보리와 밀 같은 씨앗을 뿌려 그 수백 배를 수확할 수 있었다. 안정적인 생활과 충분한 식량 덕에 인구는 계속 늘어났다. 특히 양과 늑대와 같은 짐승을 길들여 가축을 기르면서 농업과 목축업을 병행했던 것 역시도 큰 특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밀보다 쌀이라지만, 인류의 4대 문명이 모두 쌀보다는 밀 재배지에서 일어난 것을 보면, 밀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인간과 함께 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잉여와 사유제도가 계급을 발생시켜]

어느 문명이나 강 하류를 근거지로 해서 발달했다. 농사짓기에 좋은 퇴적층이 강 하류에 쌓이기 때문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하류의 수메르 사람들은 이런 지역에서 강줄기를 따라 여러 개의 마을들을 이루었다.

이후 농경의 확대로 잉여농작물이 생겨났고 빈부격차가 발생했다. 이때까지만해도 인류는 같이 일해서 함께 나눠먹던 원시공산주의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수메르 사회에서 최초로 사유제도가 나타났다.

이제 수메르에선 밀 생산량에 따라 계급도 달라졌다, 밀을 많이 생산하는 사람이 더 많은 재산을 가졌고, 그 재산을 바탕으로 더더욱 많은 재산을 벌어들이며 계급의 개념이 굳게 자리잡은 것이다. 계급의 분화를 바탕으로 공동체가 커지면서 관개시설 건설 등에 필요한 여러 가지 통치수단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관개시설과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는 주변 지역과의 교역에 필요한 자본이 되었다. 수메르 사람들은 잉여 농작물을 다른 필요한 물건들과 바꾸기 시작했다. 이런 물물교환을 위해 ‘밀 다발’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이를 ‘세겔(Shekel)’이라 불렀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선 화폐로 세겔을 쓰고 있어, 세겔은 인류 최초의 화폐이자 가장 오래 쓰이고 있는 엄청난 화폐 단위이다. 이처럼 인류 최초로 재배한 작물, 최초의 교환 작물, 최초의 화폐, 이렇게 밀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놀랍지 않은가?

 

[밀이 가는 곳에 빵도 함께]

우리가 먹는 빵, 즉 밀을 재료로 한 빵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고대 근동과 이집트 사람들은 곡물껍질을 벗기기 위해 구운 이삭을 돌로 문지르거나, 말리거나, 절구를 사용했다. 그런데 밀은 특성상 낱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데기만 손쉽게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에 고대인들은 밀알을 통째로 부서뜨려 가루를 낸 다음, 껍데기를 따로 제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들고 이를 불 위에 올려놓아 만든 초기의 빵은 납작하고 딱딱했다, 흔히 말하는 ‘전병(煎餠)’을 생각하면 비슷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빵’과는 조금 다르긴 하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발효’를 거친 최초의 빵은 메소포타미아지역과 고대 이집트지역에서 나타났다. 이런 발효빵을 처음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의 한 소년이 빵을 굽고 남은 반죽을 잊어먹고 그대로 두었는데, 이것이 공기 중의 효모균에 의해 자연 발효되어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역사적인 건망증을 가진 소년이다.

좌우지간, 이렇게 부푼 반죽을 구웠더니 기존의 딱딱한 빵과는 다른 부드러운 감촉의 맛있는 빵이 되었다. 반죽이 발효되면서 공기구멍이 많이 생겨나 소화도 잘 되고 맛과 향도 더욱 좋아졌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에서는 점차 빵 만드는 방법과 효모배양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뒤 이집트에서는 누룩을 넣은 부드러운 빵이 대세가 되었다.

이후 이 훌륭한 발효빵을 만드는 방법은 지중해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지중해를 제외하곤 비교적 ‘미개하던’ 유럽대륙 전역에 천연효모 발효 빵을 만드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로마에서는 제분, 제빵 기술이 크게 발달했고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이 기술들도 유럽 각지로 전해지게 된다. 이렇게 빵 문화의 전파 덕분에 밀농사도 널리 퍼져나갔다.

그 뒤 밀은 인도를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힘의 하나도 밀농사를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여 식량 생산 능력이 증가한 결과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지금은 중국이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이다. 우리나라에는 기원전 200~100년경에 유입되어, 평안남도 대동군 미림지에서 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밀이 잘 전파될 수 있었던 건 밀이 자라는 기후조건이 까다롭지 않아서이다, 말하자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기르기 쉽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밀은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라지만 기후 적응성이 강해 기온이 낮거나 건조한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재배가 가능하다. 그렇다 보니 쌀보다 넓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역사 속의 밀]

서양에서는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먹어왔다. 밀은 단백질과 미네랄, 비타민 함유량이 우수해, 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보다 키와 체격이 더 크다. 하지만 칼로리 자체는 밀이 쌀이나 옥수수보다 낮아 더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런데 빵은 단백질 함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정작 쌀에 비해 필수 아미노산(신체 단백질의 재료) 함량이 적은 편이라 고기와 우유 등을 함께 섭취해 아미노산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밀과 고기를 서로 바꾸기 위해 길을 만들어 점점 넓은 지역으로의 거래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거래는 상업과 교역의 발달을 낳았다.

또한 밀은 인류 역사에서 한 나라의 흥망과 전쟁 결과를 뒤바꿔 놓기도 했다.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이 ‘페르시아-스키타이 전쟁’은 청야(淸野)전술로 유명하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 군과 하루 정도의 거리를 두고 후퇴하면서 식량이 될 만한 밀밭을 모두 불태웠고 우물도 메웠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군에 허점이 보이면 전광석화와 같이 반격을 가한 후 다시 후퇴하곤 했다. 소위 전형적인 청야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청야전술은 고조선이나 고구려도 중국과 싸우면서 자주 써먹던 방법이다. 이들은 중국과 싸우면서 성을 지킬 때 들판의 곡식을 모두 불태워두고, 성문을 굳게 잠근 채 장기전을 벌였다. 그리고 별동대를 움직여 적군의 후미에서 보급로를 차단했다.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중국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전쟁할 때도 러시아군은 곡창지대의 밀을 전부 없애버렸다. 이 전략은 다시금 먹혀들어가, 결국 밀을 구하지 못한 프랑스군은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는 또 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면화를 생산하던 부유한 남부는, 막상 전쟁이 터지자 밀을 생산하던 북부에게 패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결국 핵심은 식량문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밀은 상업문화를 만들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등 역사를 바꾸는 힘을 가진 작물이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주목받는 국내 토종 앉은뱅이 밀]

국내에도 토종 밀 품종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앉은뱅이 밀’이라 하여 서양 밀에 비해 키가 작은 품종이 있다. 이 밀은 키 높이가 50~80cm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 밀이 육종학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키가 작으면 쓸모없는 줄기를 덜 만들 뿐 아니라 줄기가 짧아 많은 낱알을 달고도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학자들은 앉은뱅이 밀의 작은 키와 수확이 많은 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한국의 앉은뱅이 밀을 일본으로 들여갔다. 그런데 농학자 노먼 볼로그가 일본에서 찾은 이 앉은뱅이 밀 계열의 품종을 활용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세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노먼 박사는 앉은뱅이 밀로 밀 수확량을 60% 늘려 기아에 허덕이던 동남아인 1억 명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농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토종밀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의미가 된다.

현재 우리는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30여년 만에 절반으로 떨어졌다. 쌀 소비는 점점 줄어들고 거꾸로 밀 소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쌀 1인당 연간 소비량은 61kg로 떨어졌고 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35kg 이상으로 증가했다. 식생활의 서구화, 그리고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흐름의 영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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