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소금) 8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소금) 8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09.17 13:00
  • 최종수정 2019.10.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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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명사의 숨은 주인공, 소금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4대 문명부터 로마, 인도,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전한 곳에는 예외 없이 소금이 있었다. 문명은 항상 소금의 기반 위에서 탄생했으며 소금 덕분에 도시와 나라를 이룬 곳이 많았다.

인간들뿐 아니라, 무릇 생명활동을 하는 동물들은 모두 소금을 필요로 한다. 야생염소는 절벽에 붙어 있는 소금을 핥기 위해 수직 암벽을 기어오른다. 염소는 소금을 아주 좋아하는 동물로 염소라는 말 자체가 ‘소금을 좋아하는 소’, ‘수염 난 소’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야생염소나 산양 같은 동물들은 염분이 모자라면 이빨과 발톱이 약해져 먹이를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신체 활동능력도 약해져 천적들에게 잡아먹히기 쉽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소금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이유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원이 물, 식량, 불, 소금이다. 그래서 소금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하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다. 보통 문명은 강 하류에서 탄생하는데, 이는 그곳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4대 자원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됐다.

 

[소금이 장거리 해상무역의 기원이다]

가나안 사람들, 곧 페니키아가 해상무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귀중한 소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황하 문명보다도 훨씬 앞섰던 홍산 문명도 그 주변에 염수가 있어 가능했다. 경제사를 추적해 보면 모든 문명의 탄생은 물론, 문명간의 교역에도 소금이 숨어있었다.

기원전 3천 년경 가나안 해안지역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은 열악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해야 했다. 그들의 등 뒤는 해발 3000미터의 거대한 레바논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남은 길은 하나, 즉 바다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가나안인들의 최초 수출 품목은 그들 지역의 특산물로 만든 올리브유와 포도주, 그리고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햇볕에 말린 건어였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에 가서 교역을 하며 이집트 소금호수의 밑바닥에 생긴 소금덩어리인 조염을 사왔다. 그들은 이것을 끓는 물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한 깨끗한 정제 소금을 만들어내, 이것을 다시 소금이 안 나는 지중해 지역에 내다 팔았다.

지중해 연안은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이 대부분이어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갯벌이 거의 없다. 또 북부 지역은 대체적으로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아 더더욱 소금생산이 어려웠다. 그만큼 소금은 지중해 연안에서 매우 귀했던지라 다른 민족들에게 비싼 값에 팔렸고, 멀리 갈수록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장거리 교역의 근원이 되었다.

사진 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 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소금이 청동기시대를 만개시키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스트라본에 의하면, 기원전 2000년경 가나안 사람들은 소금을 가지고 멀리 영국 남부 콘웰 지역까지 가서 청동의 재료인 주석과 바꾸어왔다. 이렇게 유럽 대륙에 대량의 주석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청동기 시대가 만개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러한 장거리 해상교역을 위해 중간 중간에 보급품을 조달 받을 수 있도록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이 식민도시들이 후에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주요 도시들로 성장하게 된다. 그중 하나는 로마를 위협했던 대도시 카르타고도 있었다.

또한 가나안에는 주변에서 소금을 사러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거래가 활발하고 시장이 발달한 곳에서는 경제가 더 빨리 발전하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에는 암염 광산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라서 소금 생산이 가능한 곳이 지중해 해안 중에서도 일부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서양 문명의 정수라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도 결국 소금의 생산력에 기반한 것이다.

참고로 그리스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자주색 옷을 입고 다닌다 하여 그들을 ‘페니키아’ 곧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값비싼 보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페니키아란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사람들이 해상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부터 불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과 바람의 축복, 천일염]

소금은 바닷가에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바닷물에는 소금이 약 2.5%, 그 밖의 광물이 약 1% 정도 들어있다, 생각만큼 많이 안 나온다는 의미다. 또한 바닷물에서 천일염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염전을 꾸밀 수 있는 갯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갯벌이 있는 바다라는 것도 역시 우리 생각만큼 흔한게 아니다(우리야 서해안에 엄청나게 큰 갯벌이 있으니 흔해 보이겠지만).

게다가 갯벌이 넓고 적당한 조석 간만의 차가 있어 계단식 염전을 꾸미기에 알맞아야 한다. 그래야 잇달아 있는 염전에 바닷물을 옮겨 담아가며 증발시켜서 소금을 얻는다. 그런데 지구상에는 이러한 갯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기후가 물을 빨리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덥고 건조해야 한다. 한 해 동안 연평균 기온이 25도 안팎이어서 물의 증발량이 일정 기준 이상이어야 하고, 건기와 우기가 뚜렷해야 한다. 그리고 비가 적고 주변에 큰 산지가 없어 적당한 바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은 소금은 순도가 95~98% 정도 된다. 오늘날조차도 바닷가 염전에서 얻는 천일염은 전체 생산량의 37% 정도에 지나지 않고, 61%는 땅속에서 얻는 암염이다.

 

[로마 제국의 원동력, 소금 길]

로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한 원동력이 바로 소금에 있다는 사실, 믿겨지시는가? 필자가 로마 근교에서 ‘Via salaria'(소금길)란 표지판을 처음 눈에 담았을 때의 감흥은 아직도 잊기 힘들다. 기원전 8세기,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에는 소금거래를 하던 상인들이 모여 살았다. 당시 소금은 구하기가 어려워, 생필품이면서도 대단히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로마인들은 근교 테베레 강 하구에 유럽 최초의 인공 해안염전을 만들고 하천을 통해 로마로 운송했다. 귀한 소금이 로마에는 많다는 소문이 나자 유럽 각지에서 소금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유럽 각지에서 로마로 오는 여러 길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긴 소금 수출 길이 이른바 ‘소금길’이다.

소금 유통의 중심지가 된 로마는 점점 더 강성해졌다. 로마는 소금길에서 고액의 통행세를 받아 막대한 부를 챙겼으며, 또한 큰 돈벌이가 되는 소금 판매사업을 국가가 독점하는 전매제도로 만들었다. 그렇게 국가가 소금판매를 독점하고 수출 또한 늘면서 로마는 자연스럽게 부강해졌다. 결국 소금의 수요가 무역로를 닦아 소금길을 만들었고, 이 소금길들이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한 것이다.

 

[소금은 신뢰의 상징]

고대 유럽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소금으로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 앞에 소금 그릇을 놓아 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가운데 배신자 유다는 돈 주머니를 움켜쥐고 그 앞에 소금 그릇이 엎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가 그리스도와의 약속을 어기고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엎어져 있는 소금으로 상징한 것이다.

소금은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불변의 약속을 상징하여 세례 때 소금을 썼던 때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민수기’에는 신과 사람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룩한 인연을 ‘소금의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유다의 소금그릇이 엎어져 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유다의 소금그릇이 엎어져 있다.

[우리나라 건국의 일등공신, 소금]

소금은 우리 한민족과도 뗄 수 없는 사이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건국 때 우선적으로 확보한 지역이 소금 산지인 바닷가 갯벌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신화에 소금 장수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특히 우리 서해 갯벌은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이자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유일한 대형 갯벌이다. 서해안은 지형이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조수 간만의 차가 커 대규모 염전을 만드는 게 수월했다. 또 일조량과 기후가 천일염 생산에 적합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천혜의 지형을 이용하여 고대로부터 제염기술을 지켜왔고, 삼국시대에는 진일보한 자염을 만들었다. 자염은 어느 정도 갯벌에서 바닷물을 증발시키고 소를 이용한 써래질로 염도를 높인 후 마지막에 가마솥이나 토기에 넣고 끊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 무렵 중국은 바닷물을 토기에 넣고 불을 지펴 소금을 생산할 때였다.

세계 5대 갯벌, 자료제공: 홍익희 교수
세계 5대 갯벌, 자료제공: 홍익희 교수

고대 우리나라는 서해에 갯벌이 풍부하여 소금 생산지가 많은 관계로 중국과 달리 소금을 전매제도로 묶어두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유로운 소금 유통과 풍부한 생산량 덕분에 일찍부터 시장이 발달했다.

실제로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시장 덕분에 나타난 무기가 있으니, 바로 복합궁이다. 고조선 예맥족이 물소 뿔로 만든 복합궁은 오랜 옛날부터 유명했다. 맥족이 만들었다 하여 ‘맥궁’ 또는 뿔로 만들었다 하여 ‘각궁’이라고도 부른다. 탄력성이 좋아 사거리가 길고 1분 안에 6발 이상 쏠 수 있으며 적중률도 높았다. 당시 중국 활의 사거리가 50~100m 정도인데 비해 각궁의 사거리는 180~360m 정도였다. 그야말로 당시의 첨단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물소가 없는 우리가 어떻게 복합궁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남방 상인들이 한반도의 질 좋은 소금과 바꾸기 위해 물소 뿔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소금은 해상교역을 발전시켰고, 각 나라는 이에 맞춰 여러 곳에 소금 유통 중심지를 만들어주었다. 조선시대 ‘마포 나루터’가 좋은 예이다. 마포동과 용강동 일대의 마포 나루터는 조선시대부터 소금과 새우젓 집산지로 유명했다. ‘마포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이 있을 정도였다.

염전 하나 없는 마포가 소금 유통의 중심지라니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마포나루 상인들은 한강 수로를 이용해 서해, 충청, 전라도까지 소금과 새우젓을 공급했다. 서울의 염리동이나 염창동도 소금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도 이순신 장군이 여수 지역에 소금생산으로 군수물자를 충당한 것, 어사 박문수가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 생산을 장려한 일 등을 보면 우리 역사에서 소금은 항상 힘을 실어주는 구원투수였다.

실제 인류가 지금처럼 자유롭게 소금을 사먹을 수 있는 것은 근래 들어와서의 일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고려 충렬왕 14년(1288)에 처음으로 전매제도가 시행되어 염전에서 세금을 거둔 이래,

소금이 전매제도에서 풀린 게 1961년이니 소금이 시중에 자유롭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60년도 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이야기>, 홍익희, 행성B

지금까지 본 것처럼 소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상품이었다. 모든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발아하기 시작했으며 세계 경제사에서 빛을 보았던 국가나 도시 대부분은 소금 전매제도에 힘입어 번성한 곳이 많았다. 이처럼 귀중한 소금, 가끔씩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기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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