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네덜란드 上편) 11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네덜란드 上편) 11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10.08 14:00
  • 최종수정 2019.10.08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어, 네덜란드를 먹여살리다.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돈고기(Stock fish)’를 들어보셨는가. 중세 유럽에서 말린 청어는 요긴한 양식이자 화폐 역할도 했다. 생선의 크기와 모양을 비슷하게 손질해 말린 후, 곡식, 옷, 도구 등 온갖 물건으로 교환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항해시대 네덜란드를 부강하게 만든 비결도 청어에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유럽의 이야기부터 꺼내니 조금 낮설겠지만, 우리가 겨울철에 말려서 과메기 역시도 원조는 청어다. 먹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 녀석은 기름지고 맛이 좋아 말리면 독특한 풍미가 살아난다. 맛있는 것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유럽에서도 청어의 인기는 좋았다. 또한 그 동네도 자기들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어, 염장 후 말린 청어보다는 신선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절임청어가 인기가 더 좋았다.

1425년, 기후변화로 인해 해류가 변하면서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네덜란드 앞바다 북해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네덜란드 사람들은 너도나도 청어잡이에 나서 매년 여름 약 1만 톤의 청어가 잡혔다. 당시 네덜란드의 인구 100만 명 중 30만 명이나 청어잡이에 종사했던 걸 보면, 청어는 그야말로 네덜란드 전 국민의 밥줄이나 다름없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처럼 청어잡이에 목을 매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네덜란드 국토 대부분은 강과 바다를 메워 만든 저지대로, 이런 바다 보다 낮은 늪지에서는 목축업은 물론 농사도 어려워 먹을 것이 귀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를 해도 자신이 먹은 분량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더치페이(Dutch pay)’가 발달했겠는가.

북유럽식 청어 요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북유럽식 청어 요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너무 빨리 상하는 청어, 해결책은?]

이렇게 중요한 청어잡이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청어가 맛은 좋았지만 빨리 상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부들은 생선이 변할까봐 조업 중에도 급히 회항하곤 했다. 회항을 하다 보니 배를 먼 곳까지 끌고 갔다 오는데만 엄청난 돈이 들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한 한 어부가 등장했다.

1358년, 네덜란드의 ‘빌렘 벤켈소어’라는 어부는 ‘통절임’이라는 간단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생선을 잡는 즉시 작은 칼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대가리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엔 소금 대신 함수(鹹水, 소금물, 여기서는 바닷물을 끓여 만든다)에 절여 통에 담아 보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상 염장법을 개발한 덕분에 더 이상 생선이 상할 것을 우려해 급하게 회항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후 네덜란드 어선들은 느긋하게 조업을 하면서 배마다 청어를 가득 실어올 수 있었다.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 5세는 빌렘의 공을 기려 그의 동상을 세웠을 정도로, 이 방법은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좌)빌렘 벤켈소어, (우)청어 샌드위치, 자료출처 '세상을 바꾼 음식 이야기', 홍익희
(좌)빌렘 벤켈소어, (우)청어 샌드위치, 자료출처 '세상을 바꾼 음식 이야기', 홍익희

[배보다 배꼽이 큰]

이 방법이 대단한 이유는, 옛날부터 소금은 비싼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고 갯벌이 거의 없는 유럽은 소금 만들기가 어려워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여야했는데 오히려 소금(당시는 보통 광산에서 채취한 암염을 썼다)이 비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 네덜란드 사람들은 보존을 위해 소금 대신 함수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를 거쳐 만드는 암염보다 그저 바닷물을 끓여 만든 함수의 가격 경쟁력은 비교가 무의미했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청어산업에서 경쟁국들을 밀어내고 압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청어는 육지에 돌아와 소금에 한 번 더 절여졌다. 당시 소금 값이 무척 비쌌지만, 그래야 보관기간을 1년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절임청어 원가의 대부분은 청어가 아니라 소금이 차지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관기간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절임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생선은 기독교의 육류 금식기간(매년 140일이 넘는!)에도 먹을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 수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 전역으로 가져가 돈을 벌었다.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임청어 ‘더치 헤링(dutch herring)’을 즐겨먹는다. 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먹기도 하고, 양파를 곁들여서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청어의 비릿한 향과 양파가 조화를 이루면서 은근히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유대인의 시대가 열리다]

암흑의 중세가 끝나고 16세기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자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있는 북해 저지대로 몰려든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중상주의란 말 그대로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이 사상은 한 나라가 부강하려면 무역을 통해 국부, 곧 당시의 화폐인 금, 은을 축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중상주의는 중금주의(bullionism)라고 할 만큼 화폐를 중시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했다.

한편 값싼 원료의 확보와 수출 확대를 위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도 정부의 중요한 몫이었다. 한마디로 중상주의는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정부의 전 방위적인 강력한 계획과 간섭이었다. 네덜란드는 중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무역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는데, 중상주의 보다 자본주의 원칙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덕분에 장사의 귀재인 유대인의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유대인, 천일염 수입으로 절임청어 산업 장악]

네덜란드에겐 절임청어를 만드는 소금이 굉장히 중요했다. 당시 소금은 대부분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을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았다. 여기서 한자동맹이란 중세 독일북부 연안과 발트해연안 도시들에서 결성된 상업동맹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네덜란드로 건너온 유대인들은 이 무역에 주목했다. 그들은 암염 대신, 자기들이 살았던 이베리아 반도 북부 바스크 지역의 사람들이 값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해 절임대구를 만들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들은 바스크 천일염을 수입하여 독일산 암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어준 중요한 시초였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인, 막강하던 한자동맹을 물리치고 상권을 장악하다]

위와 같은 방식을 통해 유대인과의 소금 유통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상업 주도권은 막을 내렸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바다소금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왔다. 이 과정을 통해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소금 유통의 독과점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소금을 통해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고, 현지 화폐만 취급했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이들의 금융 유동성까지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소금을 인근국들에 싼값에 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그들은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청어산업, 분업과 표준화를 낳다]

유대인은 청어를 처리하는데도 일대의 혁신을 이루었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소금에 절여서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서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낼 수 있었고 절임청어의 생산량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렇게 청어절임은 포획부터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까지 일괄 공정으로 기업화되면서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 수협과도 같은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의회로부터 법적 권리를 부여받아 청어산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어업위원회는 품질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고, 가공품의 중량과 포장 규격 등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품질 유지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네덜란드 청어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유럽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의 조절 곧 ‘독과점 전략’은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자료 출처: 세상을 바꾼 음식이야기, 홍익희, 세종서적)

<다음 편에 계속>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