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네덜란드 下편) 12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네덜란드 下편) 12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10.10 09:00
  • 최종수정 2019.10.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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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빚은 소금과 설탕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시대를 연 유대인]

이리하여 네덜란드는 청어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한자 상인을 물리치고 유럽의 무역주도권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 덕분에 포르투갈로부터 동방상품의 유럽 유통권을 인계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네덜란드의 시대가 펼쳐진다.

그 무렵 소금도 비쌌지만 그 보다 더 비싼 것이 설탕이었다. 유대인이 떠난 앤트워프 지역의 설탕 정제산업도 1585년 이후 자연스럽게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이 앤트워프를 대신하여 원당의 집산지가 되었다. 당시로선 설탕산업이 가장 돈이 되는 첨단산업이었다. 설탕과 마찬가지로 앤트워프의 유대인 다이아몬드 산업도 자연스레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다. 덕분에 암스테르담이 당대 최대의 상업도시가 된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해상무역 증대와 비례해 커지는 상선들]

13세기에 삼각돛을 활용해 맞바람을 이겨내는 자이빙이라는 기술이 개발되자 종래 인간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선은 그 역사를 마감하고 범선에 자리를 내주었다. 1450년경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범의 장점을 혼용해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캐랙선이 등장했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배가 바로 캐랙선이다.

그 뒤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캐랙선의 크기는 점차 늘어나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이후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자 16세기에 등장한 군선이 갤리온선이다. 갤리온선은 처음부터 군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배로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 16세기 말엽의 갤리온선은 크기가 더 커졌다. 보통 1000톤에서 2000톤 규모로 건조됐는데 길이를 늘리고 폭을 줄여,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빠르고 강한 갤리온선의 등장은 해상무역을 확산시켰고 많은 식민지에 유대인 커뮤니티인 ‘디아스포라’들을 탄생시켰다.

원래 유대인들은 중세 해양국가 제노바와 베네치아때부터 선박 제조와 항해에 대한 남다른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 기술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해져 대항해 시대를 여는 원천기술이 된다. 이후 갤리온선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유대인들 덕분에 해상무역뿐 아니라 조선업 경쟁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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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갤리온선, (중) 플류트선, (우) 17세기 네덜란드 조선공장

[네덜란드의 중상주의를 연 조선업]

청어 잡이와 포경산업이 호황을 누리다보니 고기잡이배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는 자연스레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보니 고기잡이배 뿐 아니라 화물선 제작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중반부터 유대인들의 주도로 네덜란드 선박은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부품과 설계가 같아 대량으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의 배들이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울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네덜란드에서는 가볍고 표준화된 ‘보급품 수송함’의 대량 건조기술이 1570년에 개발되었다. 이는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이전에 만들어진 배에 비해 5분의 1 정도 인원만으로 운행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표준화로 건조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곧 화물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이로써 네덜란드 조선업은 당대의 최고산업이 되었다.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선박 수는 2천척이 넘었다. 대부분이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 잡이 어선이었고, 또 대형 상선과 포경선도 있었다. 1669년에는 청어 잡이와 가공처리, 통 제작, 망, 어선 건조 등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만 합쳐도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네덜란드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 정도라면 네덜란드 경제를 일으킨 것이 청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송비 경쟁력으로 세계 해운업계 평정]

영국도 해운업에 국운을 걸고 노력했지만 네덜란드 유대인들의 과감한 모험정신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무렵 다른 나라 바다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는 양 옆으로 많은 대포를 장착하고 다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대포를 장착하지 않거나 12~15문 정도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나무로 화물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경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 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그런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배를 ‘플류트(Fluyt)선’이라 불렀다. 오늘날의 컨테이너선인 셈이다. 이 배는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돛이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플류트선의 설계는 초기 갤리온선의 설계와 유사해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플류트선 한 척의 적재용량은 약 250t ~ 500t에 길이는 25미터 내외였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과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선박 건조비도 싸게 먹혔다. 영국에서 제작할 경우 1300파운드에 이를 경비가 네덜란드에서는 800파운드로 족했다.

이런 이점 이외에도 대단한 경쟁력이 있었다. 곧 발트 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승선인원이 보통 9~10명으로 영국의 동급선박 30명에 비해 저렴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화물운송비를 1/3까지 낮추었다. 이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이런 장점을 가진 배를 대량 건조했다. 이를 위해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 또한 유대인 장기였다. 청어산업에 이은 표준화가 조선업에서도 위력을 발했다. 이로써 배를 저렴하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를 장악했다. 보유상선 숫자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자본주의 싹들이 피어나다]

그 무렵 네덜란드 선주들은 자체적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원양항해에 나섰다. 이런 회사들이 몇 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의 지나친 경쟁이 문제였다. 게다가 스페인과 영국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가 나서서 하나의 회사로 합병을 유도했다. 그 결과 통합되어 탄생한 것이 동인도회사다.

그 무렵의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어느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기발한 개념을 다시 생각해낸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당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각자의 소액투자로 충당했다. 약 645만 길더 곧 금 64톤이 모아졌다. 엄청난 양(量)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이렇게 주식회사라는 형태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모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상상이 모태가 되어 선진화된 금융시스템을 바탕으로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보다 8배가 넘는 대규모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컫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처럼 해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를 물류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후 물류산업 발달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를 중계무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 무역업의 발전은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과 보험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싹들이 네덜란드에서 피어났다.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세계 물류의 중심이자 중계무역 기지다보니 유통되는 화폐의 종류만 수 백 가지가 넘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태어난 게 화폐를 통일을 목적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 모태격인 암스테르담은행이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씨앗인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중앙은행의 모태’가 차례로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이후 암스테르담은행은 신용대출을 선보이고 2~3%대의 저금리 대출을 시행해 산업혁명이 싹틀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과 자본주의 중심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청어가 조선업과 해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중상주의를 활짝 꽃피워 자본주의의 씨앗들을 탄생시켰다.

자료출처: <세상을 바꾼 음식이야기>, 홍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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