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후추) 14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후추) 14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10.31 09:00
  • 최종수정 2019.11.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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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 후추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15세기 말 후춧가루는 같은 무게의 금가루와 가격이 같았다. 생산지 가격의 100배였다. 이슬람 세력이 실크로드를 점령해 후추의 육로 수입이 막히자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그러자 후추를 수입하기 위해 포르투갈이 바닷길 탐험에 나섰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을 읽고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어,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결국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후추를 찾아 1492년 8월 3일 포르투갈과는 반대 방향으로 떠나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될 만큼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의 중대한 분기점이다.

 

[콜럼버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심취하다]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이 많아 10대 후반부터 아버지를 따라 직물과 포도주를 팔러 지중해 연안은 물론 아이슬란드까지 항해했다. 1474년 에게해 키오스섬에 유향 사러가는 항해에도 참가했고, 20대 후반에는 스페인 남부 마데이라섬으로 설탕 사러 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그는 어릴 때부터 해상무역을 하던 무역상이었다.

당시 동서무역의 주역 또한 유대인들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이슬람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이라 양 지역을 오가며 교역할 수 있는 상인은 유대인뿐이었다. 기독교도나 이슬람은 상대 지역에 들어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항해 자체가 위험했던 시기였다. 콜럼버스는 제노바 상선대 선장이 된 뒤에는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읽고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의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세 개의 인도’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인도’ 곧 원나라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그가 휴대한 이사벨라 여왕의 친서 수신인 역시도 ‘위대한 칸’이었다.

'콜럼버스와 이사벨', 바클라브 브로직, 1884
'콜럼버스와 이사벨', 바클라브 브로직, 1884

[어렵게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얻다]

17년간 후원자를 찾아 헤매던 콜럼버스는 우여곡절 끝에 수도원장 마르티나 신부의 주선으로, 1486년 1월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을 처음 알현했다. 그는 여왕을 만나 탐험계획을 설명하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대칸의 나라'를 찾아가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이 장대한 계획은 특별 심사위원회에 올려졌으나,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콜럼버스에게는 다행히도 당시 궁전에는 3인의 마라노, 즉 개종유대인들이 있었다. 궁정 유대인 ‘가브리엘 산체스’, 시종 ‘J. 가브레로’,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그들이다. 당시 유럽에는 왕실 내에 ‘궁정 유대인’이란 특이한 직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이 워낙에 재정 관리와 금융에 유능했기 때문이다. 궁정유대인은 오늘날의 재무장관 격이었다. 그들은 이사벨 여왕에게 왕실 재산의 궁핍을 설명하고, 만일 콜럼버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거대한 부를 거둘 수 있다고 거들었다.

처음에 여왕은 콜럼버스의 요구사항이 많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자신이 탐험비용을 부담해도 좋다고 발언한 것에 자극받아 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이사벨 여왕은 자금 외에도 팔로스 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을 내주게 했다. 이 외에도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했다.

마지막 난관은 선원 모집이었다. 저 넓은 바다 끝에 가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에 배를 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요청에 따라 죄수가 승무원으로 지원하면 과거의 죄를 사면해 준다는 조건을 내걸어 승무원 모집도 거들어 주었다. 결국 콜럼버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선원의 4분의 1은 사면받은 죄수들로 채워졌다.

콜럼버스는 드디어 1492년 8월 3일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출발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남반구 항해를 가능케 한 유대인의 천측력]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기 5개월 전인 3월에 이사벨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당시 추방당한 사람 중에는 랍비이자 천문학자인 ‘아브라함 자쿠토’도 있었다. 그 무렵 항해가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탐험했는데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면 대략의 위도를 구할 수 있었다. 경도는 연안을 따라 항해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남반구로 내려가면 북극성을 관측할 수 없어 위도를 구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자쿠토였다. 그는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 위도와 태양의 적위를 계산해 놓은 <천측력>을 유대어로 간행했다. 이로써 위도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남반구 항해가 가능해졌다.

그는 스페인에서 추방당하자 포르투갈로 건너가 포르투갈 왕실 천문학자로 일했다.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자쿠토의 영향이 컸다. 자쿠토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콜럼버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에 탑승한 선원들 중 우수한 뱃사람, 독도사, 통역, 외과의사 등 중요 스탭진들 역시도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콜럼버스가 이런 유대인 선원들을 만났다는 것은 행운 중에 행운이었다.

'페퍼'라 불리는 후추와 고추,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페퍼'라 불리는 후추와 고추,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콜럼버스, 서인도제도에 도착하다]

콜럼버스는 1492년 12월 바하마제도의 구아나아니섬에 도착해 자신이 인도에 온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섬을 ‘산살바도르’라고 명명했다. ‘구세주’라는 의미다. 콜럼버스는 심한 해류 때문에 원나라 남쪽 인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사실 신대륙의 첫 번째 발견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베링 해협 육로를 통해 2만 년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발견자는 바이킹족이었다. 그러나 서기 1000년경에 일어난 이 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여하튼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70일 만이었다. 콜럼버스는 바하마 제도의 구아나아니 섬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인도의 한 곳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라고 명명했다. 이 이름은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가 인도(?)에 도착해 맨 처음 한 일은 후추(pepper)를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는 없었다. 오히려 고추를 발견하고 이를 ‘빨간 후추’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바로 고추가 ‘red pepper’라 불리는 이유이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인도를 찾아냈다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슬픈 신념을 애도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은 그가 불렀던대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부르며, 그가 찾아낸 카리브해 섬들을 서쪽의 인도라는 의미로 ‘서인도제도’라고 불러주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인도하고는 전혀 상관없긴 하지만. 이처럼 현대의 이상한 지명은, 원나라를 인도와 혼동한것도 모자라 엉뚱한 동네에서 인도를 찾으며 발생한 무지의 산물인 것이다.

그가 도착해 맨 처음 한 일은 돈이 될 만한 토산품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 될 만한 게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걸 발견했다. 그 뒤 스페인은 금과 은에 집착하게 된다.

콜럼버스는 첫 귀환 길에 앵무새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동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뒤에도 신기한 동식물들을 많이 갖고 들어왔다. 콜럼버스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그가 가지고 온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 토마토, 고추 등의 남미산 작물이었다. 훗날 바로 이 감자와 옥수수가 유럽을 기근에서 구해 주었고 고추는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다.

[출처: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이야기>, 홍익희, 행성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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