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베네치아 上편) 20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베네치아 上편) 20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12.10 09:00
  • 최종수정 2019.12.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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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훈족의 침입으로 생겨난 해상도시, 베네치아]

중세 유럽에서, 훈족이나 몽골족 같은 아시아의 유목민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훈족의 왕 아틸라의 워낙 기세가 워낙 맹렬해 그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유목민족인 그들은 초원의 먹거리가 모자라면 약탈과 정복전쟁으로 먹고 살았다. 중세의 전형적인 부의 획득 수단이었다.

실제로 훈족은 452년 이탈리아 동북부까지 침입해 아길레야를 3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켜 철저히 파괴했다. 이어서 아틸라는 포강 유역으로 진출해 겁에 질린 밀라노, 파비아 등에 무혈 입성했다. 그 뒤 이들은 파죽지세로 파도바, 베로나, 브레시아, 베르가모 등 7개 도시를 휩쓸었다.

그 무렵 베네치아 주변 베네토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주교좌 교회가 있는 아퀼레야가 훈족에게 비참하게 파멸되었다는 말을 듣고 주저앉았다. 그들은 훈족의 공격에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고, 항복하더라도 학살당할 것이란 공포에 떨었다.

게다가 그 일대는 널찍한 평야 지대로, 저 멀리 산악지대로 달아나려 해도 도착하기 전에 붙잡힐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것은 반대방향, 즉 갈대가 전면에 우거져 있는 갯벌이었다.

훈족은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일파로 바다하고는 거리가 먼 민족으로, 피난민들은 훈족이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해, 훈족의 기마대들은 말이 늪지대에 빠져 더 이상 난민들을 추격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가 몽고 침입 당시 강화도로 피신해 항쟁한 경우와 비슷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무사히 섬에 도착하여 베네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 외쳤는데 베네치아는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사진제공: 홍익희
자료제공: 홍익희

[백향목 말뚝 위의 인공섬, 베네치아]

베네치아의 피난민들은 훈족이 물러간 이후에도 육지로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훈족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을 듯하다. 이들은 갯벌이 적고 땅이 단단했던 토르첼로섬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식수조차 부족한 갯벌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궁리를 해야 했다. 그들은 고기잡이를 하는 한편, 이를 햇볕에 말린 마른고기와 간혹 갯벌에서 발견되는 흙소금을 갖고 인접한 해안지역으로 나가 밀과 교환했다.

6세기 초에는 또 다른 이민족인 롬바르디족과 프랑크족이 쳐내려와 그들을 피해 섬에 모여드는 피난민들이 늘어나면서 다른 섬들로 옮겨가게 되었다. 6세기 말에는 레알토섬을 비롯해 12개 섬 모두로 영역을 넓히면서 베네치아는 얼추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그들은 섬과 섬 사이의 수로를 정비하고 본섬인 레알토섬을 관통하는 S자형의 대운하를 도시의 핵심 통로로 만들었다.

이후 잦은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늘어나자 기존 섬의 면적으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들은 물에 썩지 않는 백향목을 수입해 갯벌에 4미터 높이의 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을 얹어 인공 섬들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도시를 점차 넓혀나갔다.

약 700년에 걸쳐 100여 개의 인공 섬들이 탄생한 결과가 오늘날의 베네치아이다. 실제로 전체 122개의 섬 중 90%가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 섬이다. 놀라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공화국' 베네치아]

697년, 베네치아 사람들은 최초로 주민투표로 국가의 대표인 ‘도제’를 뽑았다. 당시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왕실이 세습하는 게 아닌, 시민들의 직접투표로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도제의 독재를 막기 위해 귀족만이 정치에 참여하는 과두정을 도입하여 견제와 균형을 유지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동로마제국 곧 비잔틴제국의 속국이었지만 이렇게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주민이 뽑은 지도자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이때부터 베네치아는 종신직 국가원수를 1797년까지 선출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7세기 이후 해수면이 내려가 소금이 생산되다]

원래 베네치아는 석호에서 나는 숭어와 장어, 소금 이외에는 별 생산물이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기후가 바뀌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소금이다.

6세기까지만 해도 보잘것 없는 어촌이었던 베네치아는 7세기 이후 해수면이 내려가 소금 생산에 탁월한 조건이 마련되었다.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1미터 이상 낮았다. 7세기와 9세기 사이에 베네치아에서 오늘날과 같은 천일염 제조기술이 개발되었다. 여러 개의 염전을 만들고 펌프와 수문을 이용해 바닷물의 염도가 점점 높아지면 다음 단계 염전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당시엔 중국이나 우리나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했다. 우리나라에 천일염 제조기술이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일이다. 일제는 1907년 인천 주안에 처음으로 천일염 염전 시험장을 설치했다. 베네치아 천일염 제조 방식이 오늘날 우리나라 염전에서 쓰는 방법이니, 얼마나 혁신적인 방식인지 알 수 있다.

 

[소금으로 동방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베네치아는 소금 무역을 기반으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갔다. 농경이나 목축이 힘든 베네치아의 유일한 희망은 바다를 통한 대외 교역이었다. 게다가 베네치아는 대단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 안쪽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해적들로부터 비교적 쉽게 방어할 수 있으면서도, 바다를 통해 레반트(동방) 지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륙과 연결되는 해안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강의 지류들이 베네치아를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베로나로 흐르는 에취강, 그리고 롬바르디아 지방을 가로지르는 포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은 이탈리아 내륙지방과의 교역관계를 창출해 냄으로써 해상교역을 뒷받침했다. 베네치아는 당시의 세계도시이자 공예수공업의 본거지인 비잔틴, 발칸반도의 슬라브 세계, 그리고 서방 세계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 기막힌 위치에 있었다.

이처럼 해상교역의 성황으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여타 도시국가들과 비잔틴의 통치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동맹상대가 되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소금으로 일으킨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소금과 절임생선으로 동방과 북아프리카에서 향료와 직물을 사들여 다른 곳으로 수출했다. 또 서방의 금속제품과 슬라브 여러 국가와 이스트리엔의 노예와 목재를 사들여 이를 다시 동방으로 수출했다.

베네치아는 알프스의 여러 협로들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독일과도 가까워 중개무역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로써 7세기 중엽 이후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으로 침체되었던 중세 유럽의 경제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0세기경부터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안가 염전에서 만든 천일염을 알프스 지역에 대량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들에게는 소금을 절반 가격에 파는 가격 차별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로마가 썼던 수법이었다.

당시 소금을 팔아 유대인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은 한 필당 금 한 덩어리에 거래되었다. 이렇게 동방무역이 번성하자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은 유럽 대륙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을 불러들였다. 유대인들이 베네치아에 몰려들면서 무역업 이외에도 모직물, 유리제품, 가죽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독일 광산의 은이 유입되었고 이 길을 따라 동방 물건이 북유럽으로 전해졌다. 흔히 언급되는 ‘베니스의 상인’이 탄생한 배경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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