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향신료 下편) 27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향신료 下편) 27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1.29 09:00
  • 최종수정 2020.01.2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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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삼각무역에 주력]

17세기에 이르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은 일본에까지 해상교역을 넓혀나갔다. 네덜란드는 1609년 일본 히라토(平戶)에 최초의 네덜란드 무역관을 설치했다. 일본과는 차, 도자기, 비단과 더불어 은과 구리도 취급했다. 당시 일본에서 네덜란드와 경쟁 관계였던 포르투갈의 사령관 로푸 드 카르발류도 유대인이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끼리의 각축장이었다.

이후 1619년에 네덜란드는 자바 섬 서쪽의 수마트라 섬을 침략했다. 그리고 포르투갈로부터 몰루카제도를 빼앗은 후, 말라카와 실론까지 점령했다. 실론은 오늘날의 스리랑카이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인 점령으로 곳곳에 식민지를 세워 무역관을 개설했다. 무역관들은 약 20여 곳에 이르렀다.

당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은 삼각무역에 주력했다. 인도네시아의 향신료와 인도의 후추, 무명 및 다이아몬드를 본국에 실어다 팔아 은을 마련했다. 당시 은은 국제 화폐였다. 그 은으로 인도네시아로 가는 도중, 인도에 들러 후추와 무명을 샀다.

당시 인도 께랄라에는 6세기에 설립된 유대인 상인조직에 있어 그들과 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인도에서 산 후추와 무명을 갖고 인도네시아에 가 향신료와, 일본에 가서 은과 구리와 바꾸었다. 그리고 일본 은을 중국에 가서 금과 비단으로 바꿨다. 한 행차에 몇 번의 거래로 수익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런 삼각무역은 오랜 기간 진행되었다.

 

[동인도회사, 호르무즈 해협으로 날개를 활짝 펴다]

호르무즈 해협 지도, 자료제공: 홍익희
호르무즈 해협 지도, 자료제공: 홍익희

이러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중요한 전기가 도래한다. 아시아 상품이 직접 거래되던 페르시아 만 어귀 호르무즈 해협의 호르무즈 항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이 항구는 1515년 포르투갈이 선점하면서 그들이 동인도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항구다. 호르무즈가 고대로부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핵심거점이었다. 배들이 이곳까지만 오면 아라비아 대상들이 물건을 받아 서양에 넘겼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덕에 현대에 들어서도 경제적/군사적 요충지로 평가받으며, 우리나라도 호르무즈 해협에 함대를 파견하고 있다.

그 무렵 유대인을 추방해 버린 포르투갈은 그 대타로 독일의 거상 푸거가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푸거가가 동방무역에 대한 자금을 댔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포르투갈 배가 동인도 무역을 독점적으로 주도했다. 인도에서 돌아오는 포르투갈 배가 호르무즈에 도착할 즈음 중동 지역에서 1000-4000여 마리의 낙타로 이루어진 대상들이 은과 금, 그리고 상품을 가득 싣고 호르무즈에 모여 거래가 이루어진다.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푸거가의 매니저들은 이 거래를 통해서 돈을 벌어 리스본에서 자금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유럽으로 보낼 향료를 적기에 다시 구입할 수 있었다.

계절풍의 극복

무엇보다도 선박이 인도양 남단을 멀리 횡단하여 아프리카를 돌아 포르투갈까지 가야할 필요가 없어지자 연안 항로를 이용해 일 년 내내 교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원거리 해양무역을 결정하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계절풍이었다. 무역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계절풍은 반년 주기로 풍향이 바뀌는 바람이다. 이렇게 바람의 방향이 일 년에 한번 바뀌면서 무역상은 한 방향으로 될 수 있는 한 멀리 갔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렇게 해상무역 상인들의 행동반경이 제약되고, 그 다음의 일은 중개 상인들의 몫이 된다.

포르투갈은 호르무즈의 지배로 계절풍이 뚜렷이 나타나는 인도양을 항해하지 않고도 동방물품을 대상들에게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본국까지 갈 필요가 없어지자 선박 운행기간이 대폭 단축되어 거래 회전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왕복에 2년 이상 걸리던 뱃길을 6개월 미만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르무즈의 점령으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 시대는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역학구도의 변화, 네덜란드의 부상]

1622년에 영국과 페르시아가 호르무즈를 탈환함으로써 포르투갈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 뒤 호르무즈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유 교역항이 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미 기항지로 점령했던 팽호에서 물러나고 대신 대만을 점령했다. 그 뒤 네덜란드는 1662년 명나라의 정성공에 의하여 쫓겨나기까지 대만에서 인력수출 및 사슴 사냥 등의 사업을 영위했다. 이어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 문제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쫓겨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39년부터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했다.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후 아시아 교역에서 네덜란드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그 뒤 네덜란드는 1641년 말라카에 향료항구를 건설하고 남반부 아래로 탐험을 계속했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네덜란드 항해사 아벨타즈만은 1642년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섬이 자기 고향인 네덜란드의 주 질란드(Zealand)와 닮았다 해서 ‘New Zealand’라고 유럽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희망봉을 빼앗고, 뉴질랜드를 식민지로 만들고, 브라질을 점령했다.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

네덜란드는 이번에는 미주 대륙을 공략하기 위해 서인도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1630년부터 1654년까지 브라질 동북부를 점령해 유대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설탕산업을 본격적으로 키웠다. 설탕 또한 당대 최고의 부가가치 상품이었다. 그 뒤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1696년 인도네시아에 세계 최초의 커피 농장을 만들었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커피 수출을 독점할 수 있었다. 돈 되는 곳의 돈 되는 사업은 모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유대인 손아귀에 들어왔다.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통해 글로벌 경제를 이룬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만행]

포르투갈로부터 몰루카제도를 접수한 네덜란드인들은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이 섬에서만 정향을 생산하도록 했다. 약간 매운 듯하면서 향기를 내는 정향은 늘 푸른 큰키나무로 분홍 꽃이 피는데, 이 꽃이 정향의 원료다. 일반적으로 꽃이 피기 바로 직전에 따서 햇볕이나 불을 지펴 말려 가공하는 과정을 거친다. 말린 꽃봉오리가 마치 못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丁香)이라 하며, 영어 이름인 클로브(clove) 역시 클루(clou, 못)에서 유래되었다.

정향은 고대부터 대표적인 묘약의 하나였다. 게다가 정향은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향료 가운데 부패방지와 살균력이 가장 뛰어나다. 현재도 정향은 햄, 소스, 수프 등 서양요리에서 필수적인 향신료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은 이후에도 무력으로 향신료 시장을 넓혀갔다. 그러나 대량공급은 정향의 가격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향신료에 다른 품종을 첨가하는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비자의 불신을 초래하여 가격이 폭락했다. 1760년 암스테르담에서는 향료 가격을 인상시킬 야욕으로 산더미 같은 향료 재고를 불태워버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향 가격이 폭락하게 되자 네덜란드인들은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한 모든 향료의 섬들에 자라는 정향나무를 모두 뽑아냈다. 그 뒤에도 향료를 불법적으로 재배하거나 거래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했다. 오랫동안 정향에 의존해 왔던 원주민들의 경제는 이러한 조치에 의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역사의 반전

1770년 모리셔스의 프랑스인 총독은 몰루카로부터 어렵게 정향나무 씨앗을 훔쳐 동아프리카 농장에서 재배했다. 이후 광범위한 향료산지로부터 향료 공급이 증가되자 향료 독점권은 무너지고 가격이 하락하여 일반 서민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동아프리카 탄자니아는 세계 정향의 9할을 공급한다. 반면에 정향나무 원산지였던 인도네시아는 오히려 정향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역사의 반전이다.

오늘날 인도네시아가 가장 많은 정향을 소비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인도네시아인들은 담배와 정향을 혼합해 '크레텍(kretek)'이라는 정향담배를 최초로 생산했는데 담배를 피울 때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나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7만 명의 노동자가 이것의 생산에 종사할 정도로 크레텍의 수요는 엄청나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인은 세계 정향의 절반을 연기로 날리고 있다.

 

[출처: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이야기>, 홍익희, 행성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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