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차와 두 전쟁)32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차와 두 전쟁)32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3.03 13:00
  • 최종수정 2020.03.0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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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차 이야기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차의 역사]

차(茶)는 원래 중국 쓰촨성과 티베트 경계의 산악지대에서만 자라는 나무였다. 차는 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유목민족들 곧 소수민족들이 널리 애용한 음료였다. 기원전 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차는 사천에서 중국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중국 강남지방에서 유행하던 차 풍속은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로 북방지역까지 확대되었다. 그 무렵 상류층 사람들은 병차(餠茶, 덩이차 또는 단차)를 만들어 마셨다. 병차는 찻잎을 찌고, 찐 찻잎을 절구에다 찧은 후에 일정한 틀에 넣고 말려 만든 고체 형태의 차다. 병차는 단차의 일종으로 필요할 때마다 차 덩어리를 부숴 ‘덖어서’(roast, 볶아서) 마셨다. 참고로 '덖다'라는 말은 '물기가 조금 있는 고기나 약재, 곡식 등을 물을 더하지 않고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힌다.'는 뜻이다.

당시 차는 불교 사원에서 많이 마셨다. 차는 처음에는 음용으로서 사용된 것 보다는 약용 또는 제사용으로 이용되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선(禪) 사상이 유행했는데 사람들은 참선할 때 정신을 맑게 해주는 약으로 차를 마셨다. 이렇게 차를 약으로 마실 때는 덖기 보다는 가루로 빻아 그대로 마셨다.

당나라 이전에는 차를 ‘도(荼)’나 ‘명(茗)’이라 불렀다. 당나라 이후 차가 대량 재배되면서 도(荼)자에서 ‘一’획을 없애고 ‘차(茶)’라 부르게 되었다. 중국 차 문화는 779년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차경(茶經)>을 집필한 덕분에 차 문화가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차와 티]

차(茶)를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러시아, 이란, 티베트와 같은 국가에서는 ‘cha’로 부른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차 수출항구가 그 지방 사투리로 테이(Tei)였다. 여기서 티(Tea)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곧 차를 육로로 수입한 나라들은 광동성 발음인 ‘cha’로 불렀고, 해로를 통해 차를 수입한 유럽 국가들은 테이(Tei)의 복건성 방언 발음인 ‘ti’로 불렀다. 그중 포르투갈은 그 식민지령인 마카오가 광동성에 있었기 때문에 ‘Cha'라고 발음되어 전해졌다. 현재 세계 어디를 가나 차를 나타내는 말은 광동어 계통의 ‘Cha'와 복건어 계통의 ‘Tea' 두가지뿐이다.

 

[중국이 독점했던 차 재배]

차가 국가 전매산업으로 거듭난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차 문화는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런 차를 ‘말차’라 불렀다. 흥미롭게도 정작 본고장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말차의 맥이 끊겼는데 일본에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차에 물을 부어 ‘우려 마시는’ 방법을 포다법(泡茶法)이라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차 마시는 방법인 포다법은 명나라 초부터 법제화돼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라며 스님의 차 심부름을 도맡아 복잡한 차 문화의 폐단을 깊이 체험했던 명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국가체제를 안정시키자마자 1391년 9월 칙령으로 차 문화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송나라 시절의 제조과정이 복잡한 병차 곧 단차(團茶) 제조를 폐지했다. 단차를 마시는 번거로움을 금지하고 채취한 차를 솥에서 간단히 ‘덖어’(roast) 만든 엽차(葉茶)를 요즘 흔히 보는 산차(散茶) 형태로 만들어 물로 우려내어 마시는 포다법으로 차를 마시게 했다.

그 무렵 차 재배는 중국이 독점하고 있었고, 중국은 차나무 묘목 반출을 엄히 금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처음으로 차를 유럽으로 수입하다]

중국차를 유럽에 최초로 전한 사람은 1560년 포르투갈의 예수회 수도사였다. 그 뒤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차를 유럽에 수입했다. 처음에는 일본 녹차를 인도네시아의 자바를 경유하여 유럽에 수출하였고 얼마 뒤 차 무역은 중국차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차를 신비의 음료라 하여 귀족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이후 차가 인기를 끌자 다른 유럽 나라들에도 팔기 시작했다.

영국에 차가 처음으로 수입되어 한 런던 상인이 1658년 신문에 광고를 냈다. “모든 의사가 추천하는 중국의 신비한 음료를 커피하우스에서 팝니다.” 차의 효능은 두통, 소화불량, 감기, 간염, 수종, 학질, 괴혈병에 효과가 있다고 광고했다. 당시 차 500g이 2.5파운드에 팔렸는데, 그 무렵 하인의 연봉이 2~6 파운드였다고 하니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알 수 있다.

처음 유럽인들이 마시던 차는 녹차였는데 18세기 이후 보이차라는 발효차가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차 가격은 커피의 10배 수준이었다. 영국인들은 이 홍차를 각별히 사랑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이 차를 즐겨 수입량이 부쩍 늘었다. 차 무역은 이익이 많았기에 서로 빨리 수입하려고 경쟁하는 통에 이 시기에 가장 빠른 범선이 제작되었다.

'티 타임'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차 문화,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티 타임'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차 문화,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하는 이유]

산업혁명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영국인들은 물 대신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 무렵 물이 이질균 등 수인성 질병과 전염병을 자주 옮기던 때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는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은 집에서 끓여 마셔야 했다.

하지만 기계로 일하는 노동자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홍차였다. 차에는 항균 성분이 있어 팔팔 끓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질병을 예방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더구나 카페인이 든 홍차는 졸음을 예방해주어 산재사고도 줄어들었다. 이처럼 홍차가 근로 효율을 향상시켜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장 노동자들에게 크게 사랑받는 음료가 되었다. (출처: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미나가키 히데히로, 2019)

 

[차가 불러온 두 번의 역사적 전쟁]

유럽에 차 문화가 뿌리를 내리면서, 차는 주요한 교역상품이 되었다. 그 무렵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량은 중국이 소극적인 탓에 많지 않았다.

1793년 무역 확대를 위해 처음으로 중국을 찾은 영국 사절단에게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다. 단지 중국산의 차, 도자기, 비단 등은 서양 여러 나라의 필수품이므로, 광동에서 무역을 허가하고 필수품을 주어 천조(天朝)의 은덕을 베풀 뿐이다.” 이렇듯 차는 ‘중국이 오랑캐에게 베푸는 은덕’이었다.

이러한 소리를 들어가며까지 차를 마셔대던 영국은 후에 차를 둘러싼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켰다. 첫번째 사건은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것은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해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영국 배에 실려 있던 342개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이다.

영국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1774년 해군함대를 동원해 보스턴 항을 폐쇄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키고 보스턴에서 잃은 손실액을 매사추세츠 자치령에서 변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에서의 모든 활동도 금지시켜버린다. 이는 미국인들을 격분케 하여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영국에 반감이 생긴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입맛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라 홍차 맛과 비슷하도록 연하게 볶은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셨다. 에스프레소와 같은 강한 맛의 유럽 커피와 대조되는 이유이다.

아편전쟁 당시 중국의 아편굴, 아편에 취해 널부러져 있다, 사진: 미상
아편전쟁 당시 중국의 아편굴, 아편에 취해 널부러져 있다, 사진: 미상

차가 일으킨 두 번째 전쟁은 1839년의 아편전쟁이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를 비롯해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는데, 수출품이라고는 모직물 정도였다. 당연히 무역적자가 날로 커져갔다. 적자 규모는 날로 늘어나 아편전쟁 직전에는 4,067만 파운드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대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어 유럽에서는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아편이다. 영국은 18세기말부터 차 대금으로 인도에서 기른 아편을 밀수로 중국에 팔아 지불하고자 했다. 그러한 영국의 몰상식한 선택에 대해 청나라 정부는 아편을 몰수하는 것으로 응대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1839~1842년)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중국은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동, 하문, 북주, 영파, 상해 등 5개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아편전쟁, 이 굵직한 두 전쟁의 계기가 모두 차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차가 얼마나 중요한 상품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예시라고 하겠다.

 

[유대인, 차 재배에 성공]

중국은 이러한 차 수출산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차나무 종자의 유출을 막고, 재배기술과 차를 발효시키는 방법까지 모두 비밀에 부쳤다. 때문에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차나무가 중국에서만 자라는 신비의 식물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네덜란드계 유대인 야콥센이 차 묘목을 목숨 걸고 마카오를 통해 몰래 빼내면서 달라졌다. 그는 33년간 5차례에 걸쳐 묘목을 반출해 재배를 시도하며 번번히 실패를 맛봤다. 그러다 마침내 1828년에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경작에 성공하며 차 시장의 새로운 전기가 열린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스리랑카(실론) 차 재배로 중국의 독점이 깨지고 대중화되다]

한편 유대인들은 1670년 병충해로 몰살당한 스리랑카의 커피농장에 다시 커피나무를 심어 재배를 시도했지만 1869년에 또 다시 병충해로 커피나무가 전멸해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 그곳 커피농장주의 한 사람이었던 제임스 테일러에 의해 커피를 대신할 작물로 등장한 것이 차나무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스리랑카에서는 저렴하고 품질 좋은 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 덕에 당시 차 시장을 독점하던 중국의 녹차산업은 무너지고, 차가 대중화되었다. 지금도 실론 홍차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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