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국산 밀) 34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국산 밀) 34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3.17 09:00
  • 최종수정 2020.03.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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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기아에서 건진 우리나라의 앉은뱅이 밀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토종 밀 품종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앉은뱅이 밀’이라 하여 서양 밀에 비해 키가 작은 품종이 있다. 이 밀은 키 높이가 50~80cm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 밀이 육종학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키가 작다는 것은, 농업적으로 쓸모없는 줄기를 덜 만들 뿐 아니라 줄기가 짧아 많은 낱알을 달고도 쓰러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학자들은 앉은뱅이 밀의 작은 키와 수확이 많은 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현재 세계 밀 종자의 80%가 한반도의 전통 토종 ‘앉은뱅이 밀’에서 개량한 밀 종자이다. 특히 앉은뱅이 밀은 키가 작고 병충해에 강하고 단위 면적당 소출이 많아 1960년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 개량 보급되어 세계 녹색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앉은뱅이 밀, 세상을 지배하다]

그 과정은 어땠을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한국의 앉은뱅이 밀을 일본으로 들여갔다. 그런데 밀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농학자 노먼 볼로그가 일본에서 찾은 이 앉은뱅이 밀 계열의 품종을 활용해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세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노먼 박사는 앉은뱅이 밀을 다수확 밀과 교배해 줄기가 튼튼하고 낱알이 많이 열리는 ‘소노라’를 개발했다.

‘소노라’ 변종들은 멕시코의 밀 생산량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1963년이 되자 멕시코에서 재배되는 밀의 95%가 ‘소노라’ 계통이었으며 밀 수입국이던 멕시코는 이때부터 밀 수출국이 됐다. 또한 파키스탄과 인도로 보급된 ‘소노라’ 덕분에 1965년에서 1970년 사이 이 지역들의 밀 생산량은 두 배 이상 증가할 수 있었다.(출처: ‘녹색혁명을 이룩한 볼로그와 노벨평화상’, 김환규 서평위원/전북대 생명과학과, 교수신문, 2012.07.10)

노먼 박사는 이 밀로 밀 수확량을 60% 늘려 기아에 허덕이던 동남아인 10억 명 이상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농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의 ‘앉은뱅이 밀’이 없었다면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한 ‘소노라’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토종밀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의미가 된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 현대사 속의 밀]

6.25 동란 와중에 우리 민족을 기아에서 구해준 것도 밀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6.25 전쟁의 상처는 매우 깊었다. 그 무렵 한국인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내몰렸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미국은 당장 한국의 시급한 기아해결과 전쟁피해 복구를 위해 원조를 재개했다.

1950~51년 미국 원조는 1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원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53년부터는 연간 2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 휴전 즈음인 1953년 7월에는 1954년도 한국경제 부흥비로 3억 달러를 책정한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다. 이어 이듬해 7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1955년도 원조 금액으로 무려 7억 달러를 얻어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먹고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미국은 원조를 농산물과 같은 그들의 잉여물자로 지원했다. 1955년 5월에 한미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되어 이때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밀가루 배급 타러 나온 아이들, 사진제공: 전쟁기록관
밀가루 배급 타러 나온 아이들, 사진제공: 국가기록관

당시 우리나라는 의식주 해결이 시급했다. 미국은 밀(소맥)을 위주로 한 보리(대맥) 등을 보냈다. 당시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생산량의 40%를 차지했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였다. 따라서 당시 밀가루 값은 쌀값 1/6 수준이었다. 이러니 없는 형편의 국민들로서는 거의 전적으로 밀가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 당시 한반도에 15개의 제분공장이 있었으나 6·25동란 중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후 남한에 1952년 ‘대한제분’이 설립되고, 1953년 ‘조선제분’이 시설을 복구함으로써 밀가루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가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번창했던 게 국수를 뽑아내는 국수가게와 빵공장들이었다.

그나마 국수도 사먹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그때 밀가루 음식을 하도 먹었던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훗날 밀가루 음식을 싫어했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고질적인 쌀 부족 때문에, 50년대는 공무원 월급으로 베트남에서 수입한 안남미라는 찰기 없는 푸석한 쌀을 배급하기도 했다. 이때 원조물품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 제분, 제당, 방직산업이었다.

 

[쌀 소비 줄고 밀 소비 늘어]

현재 우리는 농업 생산능력도 충분하고,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30여년 만에 절반으로 떨어졌다. 쌀 소비는 점점 줄어들고 거꾸로 밀 소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쌀 1인당 연간 소비량은 61kg로 떨어졌고 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35kg 이상으로 증가했다. 식생활의 서구화, 그리고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흐름의 영향인 듯하다. 여느 나라 부럽지 않은 부유한 국가가 된 오늘, 가장 가난하던 시절의 식량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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