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토종 밀 품종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앉은뱅이 밀’이라 하여 서양 밀에 비해 키가 작은 품종이 있다. 이 밀은 키 높이가 50~80cm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 밀이 육종학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키가 작다는 것은, 농업적으로 쓸모없는 줄기를 덜 만들 뿐 아니라 줄기가 짧아 많은 낱알을 달고도 쓰러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학자들은 앉은뱅이 밀의 작은 키와 수확이 많은 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현재 세계 밀 종자의 80%가 한반도의 전통 토종 ‘앉은뱅이 밀’에서 개량한 밀 종자이다. 특히 앉은뱅이 밀은 키가 작고 병충해에 강하고 단위 면적당 소출이 많아 1960년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 개량 보급되어 세계 녹색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앉은뱅이 밀, 세상을 지배하다]
그 과정은 어땠을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한국의 앉은뱅이 밀을 일본으로 들여갔다. 그런데 밀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농학자 노먼 볼로그가 일본에서 찾은 이 앉은뱅이 밀 계열의 품종을 활용해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세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노먼 박사는 앉은뱅이 밀을 다수확 밀과 교배해 줄기가 튼튼하고 낱알이 많이 열리는 ‘소노라’를 개발했다.
‘소노라’ 변종들은 멕시코의 밀 생산량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1963년이 되자 멕시코에서 재배되는 밀의 95%가 ‘소노라’ 계통이었으며 밀 수입국이던 멕시코는 이때부터 밀 수출국이 됐다. 또한 파키스탄과 인도로 보급된 ‘소노라’ 덕분에 1965년에서 1970년 사이 이 지역들의 밀 생산량은 두 배 이상 증가할 수 있었다.(출처: ‘녹색혁명을 이룩한 볼로그와 노벨평화상’, 김환규 서평위원/전북대 생명과학과, 교수신문, 2012.07.10)
노먼 박사는 이 밀로 밀 수확량을 60% 늘려 기아에 허덕이던 동남아인 10억 명 이상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농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의 ‘앉은뱅이 밀’이 없었다면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한 ‘소노라’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토종밀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의미가 된다.
[한국 현대사 속의 밀]
6.25 동란 와중에 우리 민족을 기아에서 구해준 것도 밀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6.25 전쟁의 상처는 매우 깊었다. 그 무렵 한국인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내몰렸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미국은 당장 한국의 시급한 기아해결과 전쟁피해 복구를 위해 원조를 재개했다.
1950~51년 미국 원조는 1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원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53년부터는 연간 2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 휴전 즈음인 1953년 7월에는 1954년도 한국경제 부흥비로 3억 달러를 책정한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다. 이어 이듬해 7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1955년도 원조 금액으로 무려 7억 달러를 얻어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먹고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미국은 원조를 농산물과 같은 그들의 잉여물자로 지원했다. 1955년 5월에 한미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되어 이때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나라는 의식주 해결이 시급했다. 미국은 밀(소맥)을 위주로 한 보리(대맥) 등을 보냈다. 당시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생산량의 40%를 차지했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였다. 따라서 당시 밀가루 값은 쌀값 1/6 수준이었다. 이러니 없는 형편의 국민들로서는 거의 전적으로 밀가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 당시 한반도에 15개의 제분공장이 있었으나 6·25동란 중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후 남한에 1952년 ‘대한제분’이 설립되고, 1953년 ‘조선제분’이 시설을 복구함으로써 밀가루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가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번창했던 게 국수를 뽑아내는 국수가게와 빵공장들이었다.
그나마 국수도 사먹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그때 밀가루 음식을 하도 먹었던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훗날 밀가루 음식을 싫어했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고질적인 쌀 부족 때문에, 50년대는 공무원 월급으로 베트남에서 수입한 안남미라는 찰기 없는 푸석한 쌀을 배급하기도 했다. 이때 원조물품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 제분, 제당, 방직산업이었다.
[쌀 소비 줄고 밀 소비 늘어]
현재 우리는 농업 생산능력도 충분하고,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30여년 만에 절반으로 떨어졌다. 쌀 소비는 점점 줄어들고 거꾸로 밀 소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쌀 1인당 연간 소비량은 61kg로 떨어졌고 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35kg 이상으로 증가했다. 식생활의 서구화, 그리고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흐름의 영향인 듯하다. 여느 나라 부럽지 않은 부유한 국가가 된 오늘, 가장 가난하던 시절의 식량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