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라면) 41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라면) 41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5.12 09:00
  • 최종수정 2020.05.1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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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의 탄생]
우리가 즐겨먹는 ‘라면’은 본래 면발이 가는 중국 북방의 ‘납면(拉麵)’이라 불리는 국수였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으로,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길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이른바 수타국수이다. 1870년대 일본에 들어온 중국인들이 노점에서 납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납면의 일본식 발음이 라멘이다. 닭뼈나 멸치 등으로 우려낸 육수에 ‘중화면’이라는 국수를 말아먹는 음식이었다.

이러한 국수가 튀김 면으로 바뀐 데는 사연이 있다. 일본 전체가 굶주림에 시달리던 당시인 1950년대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는 전문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면 가게를 차렸지만, 전후 상황이라 돈을 벌기는커녕 빚을 져 그의 삶은 어려웠다.

1957년 어느 날 부인이 튀김을 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덴뿌라를 튀기니 덴뿌라의 수분이 다 날아가는 것을 보고 이에 착안해 밀가루 면을 튀겨서 보존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꼬불꼬불한 라면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958년 식량난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닛신(Nissin) 식품을 세우고 사업가로 나서서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구호물자 밀가루로 면발이 굵은 튀긴 면을 생산했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멘이 탄생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안도 모모호쿠, 제조특허 독점을 포기하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던 안도 모모호쿠는 인류의 배고픔을 다소라도 줄이는데 기여하기 위해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국내외 업체가 자유롭게 라면을 생산할 수 있도록 제조특허 독점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수많은 복제상품이 등장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71년 컵라면을 개발했다.

면발이 꼬불꼬불한 이유는 작은 봉지나 컵에 긴 면발을 넣으려면 최대한 꼬불꼬불 뭉쳐 있는 게 좋았다. 라면 한 가닥 길이는 약 65cm로 한 봉지 면발의 총 길이는 50m나 된다. 또 꼬불꼬불하면 면이 잘 부서지지 않고, 쫄깃쫄깃해 식감도 더 좋다. 그는 이 모든 특허를 포기해 수많은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건져낸 것이다.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자료제공: 삼양

[요쿠이 기요스미 사장, 무상으로 기술 일체를 가르쳐주다]

일본에 안도 모모호쿠가 제조 독점을 포기했다면, 한국에 그것을 전해준 것은 요쿠이 기요스미 묘조(明星) 식품 사장과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있다.

전중윤 명예회장(당시 제일생명 사장)은 1960년대 초 남대문시장에서 사람들이 미군이 남긴 음식으로 만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서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래서 전 사장은 무엇보다 식량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1950년대 말부터 보험회사를 운영했던 전중윤은 일본에서 라면을 먹어본 경험이 있던 터라 그는 조리가 간편한 라면이 대규모로 보급된다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5만 달러를 빌려 일본의 묘조 식품으로부터 라면 제조기술과 기계를 도입했다. 묘조 사장은 전후 어려운 한국의 사정을 듣고 흔쾌히 무상으로 기술 일체를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전 사장은 삼양라면을 만들 수 있었다.

1963년 9월 삼양라면이 출시되었다. 무게 100그램, 가격은 10원이었다. 전 사장 역시 배고픈 사람들을 생각해 당시 일본 라면 평균 무게(85g)보다 15g 많았으며 가격도 최대한 싸게 내놨다. 당시 커피 값 35원, 담배 값 25원보다 훨씬 저렴했다.

이어 1965년 롯데공업(현 농심)도 라면 사업에 뛰어들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1980년대에 이르자 업계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한국야쿠르트(현 팔도), 오뚜기, 빙그레가 라면 사업부를 신설하거나 작은 업체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뛰어들었다.

라면이 처음 생산되던 당시만 해도 하얀 국물 맛이 밋밋해 사람들이 외면했다. 그러던 것이 한국인 입맛에 맞추어 맵고 짠 지금의 라면으로 재탄생했다. 1986년 첫 선을 보인 신라면이 등장하면서부터 현재 우리나라 라면의 절대 강자는 신라면이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최고다. 국민 1인당 5일에 한 번, 1년에 76번 출출한 배를 채워준다. 라면은 조리하기 쉽고 유통기한이 길어 전 세계에서 연간 1천억 개, 하루 판매량 2억8000여개가 소비된다고 한다.

세계 라면 소비량, 자료제공: 홍익희

[한류 붐을 타고 상승하는 한국 라면의 인기]

세계 라면의 40%는 중국에서 소비되고 있다. 한국무역진흥공사에 따르면 중국 라면 수입액이 2019년 2억4000만 달러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한국 라면이었다. 특히 중국에는 삼양식품 ‘불닭볶음면’ 시리즈가 인기가 높다. 중국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타오바오에서는 삼양라면 제품이 상위 10위권을 휩쓸며 한 달에 약 180만 봉지씩 판매하는 수준이다.

삼양식품이 수출에 주력했다면 농심은 1996년 중국 상하이에 현지법인과 공장을 세워 현지화전략을 추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농심은 1970년대 초 라면을 수출하면서부터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방식대로 가자”며 “한국의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라고 강조했다.

농심 진출 당시 중국인들이 라면 먹는 방법은 그릇에 면과 수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데워먹는 방법이었다. 끓여 먹는 냄비라면을 선보인 농심은 진출 초기 문화적 차이로 애를 먹었다. 이후 농심은 현지화 마케팅으로 중국 내륙도시 중심으로 ‘끓여먹는’ 라면문화 알리기에 주력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바둑대회를 개최하며(농심배 바둑대회) 친숙한 이미지 쌓기에도 힘썼다.

브랜드 인지도가 올라가자 제품력을 자신하던 농심의 라면 매출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2018년 2억8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현재 농심은 중국에 1000여 개 영업망이 있는데, 신라면의 인기가 높다. 한국라면이 인민일보가 선정한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명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다음으로 면류 소비량이 많은 국가다. 이런 인도네시아에서 한국라면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 수입시장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며 점유율 85%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 시장에서도 매운 한국라면을 찾기 시작하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한국 라면이 미국 라면시장에서도 한류 붐을 타고 라면종주국인 일본에 도전하고 있다. 미국라면시장에서 10년 전 2%에 불과했던 농심의 시장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일본의 동양수산(점유율 46%)과 일청식품(30%)에 이어 현재 농심(15%)은 3위를 달리고 있다.

농심의 수출전략은 ‘신라면 only’였다. 최근 농심은 미국시장에서 신라면과 신라면블랙에 이어 신라면건면을 내놓으면서, 일본기업들과 치열한 승부를 펴칠 계획이다. 농심 신라면은 미국 전역 월마트 4천여개에 달하는 점포 모두에 입점한데 이어 미국 최대 대형마트 체인인 코스트코 540개 점포에도 진출해 연간 두 자릿수 매출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올 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며 농심의 마케팅은 다시 빛을 발했다. 영화에 등장한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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