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 날 특집 ①] 가까운 관계에서 나타나는 학대, 가스라이팅
[정신건강의 날 특집 ①] 가까운 관계에서 나타나는 학대, 가스라이팅
  • 박서영 기자
  • 기사입력 2021.10.12 15:18
  • 최종수정 2021.10.1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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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행위

- 겉으로는 애착의 형태 띠고 있어 피해자는 학대 사실 깨닫지 못할수도

- 특정 인물의 폭력으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성 생긴다면 피해 의심해봐야

-편집자 주-

10월 10일은 세계 정신건강의 날이다. 이를 맞이해 각 지자체 등에서는 10월 한달간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우리 신문 역시 가스라이팅-ADHD-틱 장애 등 총 세 개의 정신건강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정신건강 상식을 전달하고자 한다.

[헬스컨슈머] 최근 SNS를 통해 사용 빈도가 높아진 단어가 있다.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패트릭 해밀턴이 연출한 1938년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전문적인 학술 용어는 아니지만, 많은 이의 공감을 얻으며 하나의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먼저 연극 ‘가스등’의 내용을 살펴보자. 연극 속 잭이라는 남성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한다. 이후 가스등을 켜 보석을 찾고자 하는데, 이렇게 하면 가스를 나눠 쓰던 다른 집의 불이 어두워져서 범죄가 들킬 위험이 높아진다. 이에 잭은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부인인 벨라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간다.

잭이 위층에서 불을 켜고 물건을 뒤질 때마다 벨라가 있는 층은 불이 어두워진다. 이에 벨라가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잭은 그렇지 않다며 벨라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운다. 그 말에 반신반의하던 벨라는 본인의 인지 능력을 의심하다가 결국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의존하는 상태로 전락한다.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 가스라이팅, 가까운 관계에서 더 자주 나타나

2017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성인의 데이트 폭력 가해 요인’ 조사에 따르면 가해 유형 중 ‘누군가와 있는지 항상 확인한다’, ‘통화가 될 때까지 계속 전화한다’, ‘옷차림을 제한한다’ 등의 통제 행동이 71.7%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처럼 가스라이팅은 연인, 부부, 부모 자녀 관계, 직장 동료 등 가까운 사이에서 나타난다. 다른 범죄와는 다른 양상이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서슴없이 막말을 하거나, 신체적인 폭력을 가한다. 그러면서 그 행위의 목적을 ‘애정’으로 포장한다. “네가 잘 되길 바라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나니까 너를 이렇게 받아주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못 해.” “네가 나 아니면 뭘 하겠니?”

피해자의 대부분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해자가 정말 자신에게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인지 쉽사리 인정하지 못한다. 나중에 피해자가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가해자에게 반론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너무 예민하네.”

최근 충격적인 가스라이팅 사건이 보도된 바 있다. 지난 5일 KBS 뉴스에 따르면, 한 여성이 10년 동안 과외교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가혹 행위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에게 충격을 가져다줬다.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이던 2003년이다. 당시 과외 교사였던 가해자를 알게 되면서, 그의 조언에 따라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이후 가해자의 교습소로 들어가 교사로 근무했다. 여기에는 자신을 따라오기만 하면 인생을 바꿔주겠다며 인생 멘토를 자처한 가해자의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대학 졸업 후 가해자의 집으로 들어가 상주 과외교사로 일한 피해자는 본격적인 가스라이팅에 시달렸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식모처럼 부리는 것은 물론, 가정사를 들먹이며 부모를 험담함으로써 피해자가 점차 부모와의 연락을 끊게 만들었다. 또한 피해자의 발음과 걸음걸이 등을 트집잡으며 주먹이나 쇠막대기 등으로 폭행했으며, 음식물 쓰레기나 방바닥의 머리카락과 먼지 및 화장지를 뭉친 것, 심지어 화장실의 인분을 강제로 먹이기까지 했다.

피해자는 한 명 더 있었다.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집에서 과외 교사로 근무하며 가스라이팅에 시달렸던 다른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증거 사진을 모은 뒤 겨우 집에서 탈출하게 됐다. 이후 창원지방법원은 가해자에게 상습특수폭행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 가스라이팅 피해 당하는 것 같다면 가해자와 거리 두어야

지난 6월 방송된 tvN ‘알쓸범잡’에서 가스라이팅을 주제로 다룬 바 있다. 방송에 출연한 오은영 박사는 가까운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에 관해 “가까운 사이의 경우 애착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정서적인 학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충고하는 것인지 가스라이팅인지 헷갈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피해자는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생기고, 본인이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워 상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 박사는 부모와 자녀지간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라고 전했다. 예컨대 A라는 아이와 B라는 아이가 있다. A는 시험을 못 봐서 부모가 속상해 할 것을 걱정한다면, B는 시험을 못 봐서 부모에게 혼날까봐 걱정한다. 얼핏 들으면 A가 부모 마음을 더 이해하는 것 같지만, 사실 B가 더 바람직하다. B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고 A는 부모를 걱정하는 것이다.

오 박사는 “A와 같은 아이의 경우 공감 능력이 좋기도 하지만 잘 살펴봐야 한다. (부모의)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얼마나 희생해서 키웠는데’ 등의 말이 의도치 않게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다. 주체가 누가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양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을 시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 박사는 “(가해자를) 교화하거나 설득해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절하는 게 가장 좋다.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일단 물리적,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는 노력이 필요하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가 아닌, ‘한번은 생각해볼게’라고 대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tvN '알쓸범잡' 스크린샷
tvN '알쓸범잡' 스크린샷

 

 

■ 가스라이팅 자가진단법 (출처 :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

1. 왠지 몰라도 결국 항상 그 사람 방식대로 일이 진행된다.

2. 그 사람에게 “너는 너무 예민해”, “이게 네가 무시당하는 이유야”, “비난 받아도 참아야지”,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너 혼자 상상한 것이겠지” 등의 말을 들은 적 있다.

3.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변명한다.

4.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잘못한 일이 없는지 점검하게 된다.

5. 그 사람이 윽박지를까봐 거짓말을 하게 된다.

6. 그를 알기 전보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됐다.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