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향신료 上편) 26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향신료 上편) 26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1.28 09:00
  • 최종수정 2020.01.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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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추 등 향신료는 경제사에서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다.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식민지 획득 경쟁은 바로 향신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서 시대의 다음 단계로 도약한 것이다. 이 시대 자체가 향신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육류의 맛을 내는데 동양의 향신료가 필수적이었다. 향신료 중에서도 인도의 후추, 스리랑카의 계피, 동인도 제도의 육두구, 몰루카 제도의 정향이 대표적이었다. 원래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후추는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14세기 초, 무역을 중시해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몽골 제국 원(元)나라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오스만제국이 발흥하여 유럽과 동방의 무역로를 차단했다. 그러자 유럽에서 후추 등 동방상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생산지 가격의 100배는 보통이었고, 육두구(nutmeg)의 경우 600배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의 향신료만 얻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대박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그의 글에서 "중국보다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는 대목에서 유럽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또한 항주라는 도시의 하루 후추 소비량이 4740킬로그램이나 된다고 기록해 놀라움을 자아냈다고 한다. 물론 동방견문록에는 과장되거나 불확실한 부분도 있으나, 그는 베네치아의 상인 출신답게 향신료의 산지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정확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개척자들의 발호]

이렇게 되자 신항로 개척의 필요성은 한층 절실해졌다. 1492년 콜럼부스는 후추와 금을 찾아 인도로 출발했다. 그는 대서양으로 나가도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언젠간 인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먼저 그를 맞은 곳은 서인도제도와 신대륙이었다.

이번에는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였다. 이들은 향신료를 찾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렀고, 거기에는 많은 이슬람 상선들이 입항해 있었다. 그 곳에서 단숨에 계절풍을 타고 인도양을 가로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 뱃길 안내자 덕분이었다. 이렇게 그는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진짜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무렵의 인도는 유럽보다도 훨씬 풍요로운 국가였다. 특산물인 향신료 이외에도 갖가지 수공업이 발전되어 있었다. 무명만 하더라도 캘리컷의 무명은 매우 고급품이어서 유럽인들이 한 눈에 반했다. 이때 유럽인들은 이 직물에 ‘캘리코’(calico)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 캘리코에 자극받아 면직물 산업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해석도 있다.

막대한 이윤, 포르투갈의 승승장구

좌우지간, 바스코 다 가마의 일행은 향신료와 캘리코 등 귀중한 동양 산물을 가득 싣고 귀국했다. 안타깝게도 리스본에 2년 여 만에 도착했을 때 처음 170명 가운데 생환자는 겨우 55명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상품 견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이때 6000%이라는 놀라운 이윤을 남겼다. 참고로, 중세 말 지중해 향신료 무역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이윤율은 40%정도였다니 얼마나 엄청난 성과인지 알 수 있다. 그 뒤에도 신항로의 개척으로 동방 산물이 이슬람 상인이나 이탈리아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유럽에 들어오면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엄청난 수입을 보장받았다.

이때부터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에 인도 고아(Goa)에 총독을 두고 이곳을 중심으로 식민지 개척 전략을 펴나갔다. 1511년 실론과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도 정복했다. 그리고 1515년 페르시아 만의 항구 호르무즈의 점령으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는 활짝 만개되었다. 이로써 본국까지 가지 않고도 여기서 아랍 상인들과 거래하여 짐을 처분할 수 있었다. 1517년에는 중국에 진출하여 마카오를 선점했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이 남지나해의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했던 것에 호감을 가졌다. 마카오는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 시장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중계무역으로는 최적의 입지였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은 16세기 전반에는 큰 이익을 보장하는 후추와 비단 등 동방무역을 독점해서 거대한 부를 얻었다.

 

[탐험 시대의 종말, 경쟁의 시작]

그런데 이때 경쟁국이 등장한다, 바로 스페인이다. 1519년부터 3년여에 걸쳐 마젤란의 스페인 함대가 동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는 세계 일주에 성공한 것이다. 스페인도 이번에는 ‘진짜 인도’ 항로를 찾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포르투갈과 스페인간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곳곳에 두 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이처럼 두 나라가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린 것은 모두 향신료와 동방상품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가 그간 우습게 보던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인도 항로의 주인공이 바뀐다. 16세기 말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이를 대체했다.

이때부터 바로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명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이 활발했다.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 17세기 중엽에 말레이 반도에서 자바, 수마트라 등을 비롯해 대만, 일본과 독점 무역권을 수중에 넣어 동남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100배 이상의 수익 아이템, 향신료 교역]

초기에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거래를 했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위주로 무역을 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여 인도네시아 동부 몰루카스 섬들이 향료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네덜란드인들은 직접 그 원산지를 찾아 나섰다. 1595년 네덜란드인들은 향료 무역의 중심지인 지금의 자카르타 바타비아에 근거지를 세우고 먼저 이곳에서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 사람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실론과 케이프타운에 중간 통상거점을 세우고 거대한 아시아 무역망을 발전시켰다.

당시 후추는 금값이었다. 하지만 이런 후추보다 더 비싼 게 육두구였다. 그 영어 명칭인 ‘너트메그’(nutmeg)란 사향 향기가 나는 호두라는 뜻이다. 그 무렵 향신료는 부피가 적고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매우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었다. 정향을 실은 네덜란드의 첫 상선은 무려 2500%의 순익을 남겼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경쟁이 심한 인도의 후추를 피해 동남아 지배권 확립하고 육두구와 메시스 그리고 정향을 독점 거래했다.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쪽박

유대인들은 이렇게 독점 체제를 완성하여 구입 가격과 판매 가격을 맘대로 조정했다. 그들은 생산지가격은 최저로 억누르고 유럽에서의 판매 가격은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며 독점이윤을 실현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헐값에 산 향신료들을 가득 싣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보통 100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볼 수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고향에서 영웅이 됐고, 항해에 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이렇게 향료무역은 성공하면 대박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비용과 희생도 따랐다. 향료 구입에 필요한 자금 외에도 훌륭한 대포가 장착된 배와 능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선장과 선원들을 확보해야 했다. 게다가 위험도 많았다. 17세기를 전후해 세 번에 걸쳐 동인도로 파견된 약 1천2백 명의 영국 선원들 가운데 무려 8백 명이 항해 도중 괴혈병과 장티푸스로 죽었다. 풍랑과 암초를 만나 배가 침몰하기도 했다. 또 현지 저항도 만만치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향료를 싣고 오던 배가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의 무장 범선을 만나 약탈당하고 심지어 잔인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힘든 항해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오는 선원들과 상인들의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처럼 막대한 투자가 들어간 것이 실패하면 당연히 타격도 컸다.

 

[유대인이 주도하는 동인도회사, 막강한 권력을 갖다]

동인도회사 심볼, 네덜란드 국기 바탕에 회사의 로고가 들어가 있었다, 자료제공: 홍익희
동인도회사 심볼,
네덜란드 국기 바탕에 회사의 로고가 들어가 있었다,
자료제공: 홍익희

이런 연유로 해상무역을 하는 회사는 무엇보다 군사적으로 적들보다 강해야했다. 그리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운용해야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아예 ‘주식회사와 국가가 결합된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에 주어진 권한은 정부 권한에 버금갔다.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 유대인들이 대주주로 있는 동인도회사에 아시아 독점무역권을 보장했다. 해상교역권 이외에도 식민지 개척 및 관리권도 주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협상의 권리와 교역 상대국 안에서 독립적인 주권도보장해 주었다. 아울러 식민지 개척을 위해 회사가 군대를 가질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동인도회사는 관리 임명권은 물론 식민지 개척과 운영에 필요한 치외법권과 전쟁선포권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조약체결권과 화폐발행권, 식민지 건설권, 요새 축조권, 자금 조달권 등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경쟁자와 싸울 때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동인도회사는 한 나라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동인도회사의 대주주들에게 자유재량권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위임되었다. 한 마디로 유대인 대주주들이 동인도회사의 정책과 식민지 정책을 주도한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상징인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는 한 손에는 무역, 다른 한 손에는 총을 갖고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출처: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이야기>, 홍익희, 행성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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