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커피) 31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커피) 31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2.25 09:00
  • 최종수정 2020.02.2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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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컨슈머]여러분은 하루에 커피를 몇 잔이나 드시는가? 아마도 하루를 시작하며, 또는 졸음을 쫓기 위해 한 잔 이상씩은 드실 마실 터이다. 이미 한국에서 커피는 이제 한 사람이 1년에 거의 500잔 가까이 마시는 현대인의 필수 음료가 되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소금, 후추, 설탕 등이 경제사에 끼친 영향은 역사를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이들 상품들 대부분이 유대인에 의해 유통되었다는 공통점 또한 같다. 커피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세 초기의 커피는 유대인에 의해 최초로 대량 재배되어 유통되었다. 지금도 커피 유통의 중심에는 그들이 있다. 막말로 지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스X벅스도 유대인 기업이니 말이다.

오늘날 사회인들이 물처럼 들이켜는 것과는 달리, 커피가 유럽에 선보여진 초기에는 너무 비싸 일반인들은 마시기 힘들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딸의 커피 값으로 요즘 돈으로 한 해 1만 5천 달러를 치뤘을 정도였다.

커피의 기원은 어디서 시작했을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525년 에티오피아가 예멘 지방을 침략한 시기에 아프리카가 원산인 커피가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커피라는 이름 자체가 에티오피아 커피 산지인 카파(Kaffa)라는 지역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說)은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졸음의 고통을 이기려 애쓸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 주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주었다는 비약이 바로 카베(카와)였다.

 

[커피, 이슬람교에서는 잠깨는 약]

9세기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커피를 먹었다는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당시 커피는 지금처럼 음료로 마셨던 게 아니라, 이슬람들이 밤 기도 시간에 졸음을 쫓기 위한 약으로 복용되었다. 그들은 잠을 쫓기 위해 커피열매를 씹어 먹었다.

이렇게 커피가 귀한 약이 되자 이슬람권에서는 그 씨앗이 유출되는 걸 엄격히 통제했다. 유럽으로 선적할 때도 발아 가능성이 있는 커피콩 종자 대신 볶은 씨앗만 반출했다. 이는 커피 가공법의 발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커피 열매를 씹어 먹지 않고 씨앗을 볶아서 갈아 마시는 방법이 고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슬람들은 밤늦게까지 기도하기 위해 각성제로서 커피를 마셨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양대 종교를 대표하는 커피와 와인]

커피와 와인은 인류의 역사를 이끈 쌍두마차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 어디서나 포도농장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곳에는 어디서나 커피향이 가득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멋진 선물로 여겨진다. 심지어 와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된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와인을 혐오했다. 이성과 절제를 추구하는 이슬람들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를 애호했다.

결국, 커피는 이슬람들에게 종교나 다름없었다. 이성과 절제를 추구하는 이슬람들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를 무척 애호했는데 종교적으로도 커피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전해준 음료’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원에서만 한정적으로 음용하던 커피가 11세기에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이렇게 커피가 마시는 음료로 발전한 곳이 아라비아 지역이다.

 

[모카에서 시작된 커피 독점]

커피는 1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에 소개되고 그곳에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그 무렵 서구의 커피의 독점 수입을 주도한 것도 커피의 독점 공급을 주도했던 예멘의 유대인 공동체와 교류했던 베네치아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이슬람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왕래하며 무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커피를 베네치아에 몰래 반입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커피의 매력에 곧 빠져들었다.

당시 천주교 사제들은 커피가 악마의 음료라며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음용 금지를 탄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커피를 직접 맛본 교황은 그 맛에 반해 오히려 이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커피는 단숨에 유럽을 정복하게 된다.

이처럼 커피의 수요가 급증하자, 예멘에 사는 유대 상인들은 커피 독점공급을 잘 관리하기 위해 수출용 커피를 한 항구에서만 선적하도록 했다. 그곳이 바로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모카’ 항구이다. 여기를 통해 유대인들은 커피의 반출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심지어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모카로 가져와 수출했다. 모카에는 3만 명가량의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17세기 말까지 300년간이나 커피 무역을 독점했다. 이렇게 커피가 모카 항구만을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유럽 사람들은 커피를 ‘모카 커피’라 부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카 우유’, ‘모카 크림’처럼 한국에서 ‘모카’가 커피라는 의미로 쓰이는 배경이다.

 

[인도/네덜란드판 문익점]

근대에 이르러 커피를 유럽에 대량으로 수입하여 전파한 사람들 역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인도판 문익점’에서 비롯된다,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Baba Budan)은 1600년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에 들러 커피농장에서 종자 몇 개를 숨겨 가지고 인도로 돌아왔고, 그 씨앗들이 발아하여 커피 재배에 성공했다.

이를 안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인도에 스파이를 보내 커피원두와 묘목을 밀반출했고, 네덜란드에서 커피 재배에 성공한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는 이 커피 묘목을 스리랑카 실론으로 가져가 대규모 농장 재배를 시도했다. 하지만 해충 피해가 워낙 커 실패했다. 유대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1696년 이 커피 종자를 인도네시아 자바지역으로 가져가 커피농장을 일구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커피의 최초 대량재배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고, 이로써 유대인들은 커피 재배와 커피 교역을 모두 주도하게 된다.

그 뒤 70년 동안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의 플랜테이션에서 커피를 대규모로 재배했다. 1740년에는 자바에서 필리핀 지역으로까지 커피가 전파되어 재배되었다. 이후 커피는 네덜란드의 가장 인기 있는 음료가 되었다.

1800년대 들어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도 커피, 설탕, 인디고를 강제 경작케 했다. 그리고 이를 거둬들여 유럽시장에 팔았다. 그 수익은 1850년대 네덜란드 재정 수입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이를 갖고 네덜란드 정부는 부채를 갚고 운하와 도로를 건설하는데 썼다.

반면, 커피농장 지역의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커피나무는 옥토의 지력을 빨아먹고 크는 작물이다. 그 특성상 재배가 7~8년째에 접어들면 죽은 땅이 된다. 원주민들은 식량 재배를 뒤로 한 채 돈이 되는 커피 재배에만 힘을 쏟다 결국 기아에 허덕이곤 했다.

커피농장,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커피농장,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아시아에서 중남미로 전파된 커피]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커피를 전파했다. 1715년 암스테르담 식물원 커피 묘목을 가이아나에 옮긴 것이 최초이다. 이후 커피는 수리남과 카리브 해의 식민지로 옮겨져 재배되었다. 수리남에서 자라던 커피는 이후 브라질로 들어갔고, 최상의 재배조건 덕분에 주변 남미 국가로 전파되었다.

한편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사연은 묘하다.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총독 부인이 화려한 꽃다발 속에 커피 묘목을 숨겨 잘생긴 스페인 연대장에게 선물함으로써 그 묘목은 콜롬비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브라질로 퍼져나간 것이다. 콜롬비아와 브라질로 보내진 커피는 최상의 재배조건에서 잘 자라 두 나라를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커피 생산국들, 소위 ‘커피 벨트’는 주로 적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는 반면, 소비국은 대부분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네덜란드의 교역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네덜란드는 멀리 떨어진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를 이어주려 세계의 바다를 오가며 독과점 체제를 구축했다.

 

[차에 대한 반발심으로 마신 아메리카노]

한국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커피 메뉴가 뭐냐고 하면, 역시나 단연 ‘아메리카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이름에 대한 의문이 한번쯤 있었겠지만, 아메리카노는 정말로 미국에서 탄생한 메뉴다.

아메리카노는 1773년 발생한 ‘보스턴 차 사건’과 관련이 있다. 식민지 당시 미국인들은 차를 즐겨 마셨는데, 영국이 수입 차에 상당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반발한 미국인들은 수입 차 불매운동을 하며, 대체 음료로 커피를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홍차를 마시던 버릇 때문에 쓴 커피도 홍차와 비슷하게 만들어 마셨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들면 색깔도 진한 홍차와 비슷해지고 맛도 차와 가까워진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선 차 대신 연한 커피, 곧 아메리카노가 유행하게 되었다. 커피는 각성 작용이 강해 활력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업무 성과향상에 도움을 주는 특성 덕분에, 이후 미국에 어울리는 문화로 정착했다.

미국과 제일 어울리는 커피, 아메리카노.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과 제일 어울리는 커피, 아메리카노.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커피의 대중화, 인스턴트커피]

커피의 제조 공정은 그 과정이 복잡하기도 하고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중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물만 부으면 간편히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 덕분에 커피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인스턴트커피가 상품으로 대중화된 것도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1920년대 말 브라질에서는 커피콩이 풍년이었다만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커피콩 시세가 폭락하여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브라질 정부는 식품회사 ‘네슬레’에 남은 커피콩으로 가공식품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38년 ‘네스카페(Nescafe)’라는 인스턴트 커피였고, 그렇게 해서 인스턴트커피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전쟁 또한 인스턴트커피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싸워야 하는 군인에게 인스턴트커피는 큰 힘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도입된 것도 한국 전쟁 때라고 한다. 미군 전투식량에 인스턴트커피가 들어있었는데, 이것이 전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커피. 비록 유대인들의 독점상품으로 시작되었지만, 인류의 식음료 문화를 바꿔놓고 많은 사람들의 잠을 쫓는 기호식품이 되었. 유대인들의 발 빠른 대량 재배와 탁월한 교역 능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을까. 오늘도 커피 한 잔으로 상쾌한 하루 보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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