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고래잡이와 개화기) 45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고래잡이와 개화기) 45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6.16 09:00
  • 최종수정 2020.06.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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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과 포경의 역사/ 반구대 암각화

[헬스컨슈머]고대에는 어업의 최종단계가 바로 고래잡이, 즉 포경이었다. 대규모 협력어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류는 기나긴 포경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를 보면 기원전 3000년경부터 고래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훨씬 앞서 고래를 잡았던 모습이 그려진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반구대 암각화]

이를 증명하는 유적이 1970년 울산 대곡천 중류의 암벽에서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이다(국보 제285호). 바다 생물과 육지 동물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희귀한 자료다. 암각화는 그림으로 그려진 역사 기록으로, 우리나라에 고대 암각화들이 20여 군데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세계 최초의 포경유적이다. 고래 종류만 8종에 7점의 집단 포경선이 있다. 그 중에는 20여명의 어부를 태운 큰 배도 있다. 배 앞부분에 탄 사람이 끈이 달린 창으로 고래를 찌르려 하고 있다. 이렇듯 고대에 집단 포경업을 할 정도로 우리 조선업과 항해술이 발달해 있었다. 이는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한반도 고유의 평저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의 고대 문명을 추정할 수 있는 귀한 유적이다.

8000년 전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모습들
반구대 암각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안길 285, 국보 제285호, 사진제공: 홍익희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물 나간 갯벌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밑바닥이 평평한 배인 평저선을 이용해 고기잡이를 해왔다. 수심이 얕은 서해바다 뿐 아니라 수심이 깊은 동해바다에서 고래사냥까지 했다.

바위에 새긴 암각들은 우리 조상들이 8000년 전부터 고래사냥을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암각화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가 62마리나 그려져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옛날에 고래를 잡기 위해 협동어업을 했다는 점과 작살과 부구, 낚싯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로 10m,높이 4m 크기의 암각화에는 고래, 거북 등의 바다 동물과 가마우지 같은 새 그리고 범, 곰, 멧돼지, 사슴, 토끼, 여우 등의 육지 짐승 이외에도 사람, 배, 그물, 울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어업과 수렵 생활을 동시에 영위하면서 잡았던 동물들과 사냥 도구들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도 머리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샤먼 그림이 있다. 이는 새처럼 날아서 천지신명에게 소원을 전달하려는 염원을 나타낸다. 그 소원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지 않고 고래를 무사히 잡기를 비는 것이다. 이런 새 모양의 머리 모습은 희한하게도 동서양이 일치한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포경 때문에 촉발된 개화기-신미양요]

미국은 17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연안포경으로 시작해 점차 원양포경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1791년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용 윤활유와 연료유의 사용량이 급증하자 고래 기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래들은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양의 기름과 고기를 제공했다.

고래 황금어장, 한반도 동해안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듯, 우리 동해안은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로 유명한 곳이었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 밤에 불을 밝히는 등불의 기름은 고래 기름이었다. 고대부터 포경산업이 발전하고, 근대 이전까지도 성행했던 이유다.

특히 우리나라 동해안 일대는 혹등고래, 향유고래, 귀신고래가 많았다. 일 년 동안 북태평양을 회유하며 사는 고래들, 또 일 년 동안 북극과 남극을 오가며 사는 고래들은 남극으로 가기 전, 동해안에서 새끼를 낳고,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란 이후에 다시 남극을 향해 내려가기 때문에 한류와 난류가 만나 먹이 감이 풍부한 동해안은 고래들에게 육아 장소로 적격이었다. 그야말로 황금어장이 한반도 동부에 펼쳐진 것이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서구 열강의 한반도 진출 - 고래잡이

1820년대에 미국은 태평양을 횡단해 일본 근해까지 진출했다. 그래서 전 세계 포경선단이 동해로 몰려들었다. 1850년대부터 동해로 몰려든 미국 포경선단은 식수와 식량조달 등을 위한 보급기지가 필요했다. 영국과 러시아 등 당대 최강 열강들의 분쟁지구로 분류돼 좀처럼 다른 열강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던 한반도에 개항 요구가 시작된 것은 모두 이 포경선단들 때문이었다. 당시 포경산업의 인기는 1851년 출간된 흰색 향유고래와의 사투를 그린 허먼 멜빌의 유명 소설인 <모비딕>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동해안과 일본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미국 포경선단은 미국 정부를 동원해 1854년 일본을 강제개항 시킨데 이어 조선에도 개항을 요구했다. 동해안에 많은 포경선단이 몰려들면서 난파하는 포경선 숫자도 늘어났다. 이중 미국인 실종자가 당시 조선의 동해안 앞바다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는 자국민 실종자에 대한 수색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게다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군민들에 의해 1866년 7월에 불탄 것까지 알려지면서 미국 정부는 진상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이 일은 1871년 신미양요의 빌미가 되었다.

1850년대부터 포경업으로 높아진 열강들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은 1860년대부터 노골적인 침략으로 이어졌다. 러시아가 처음으로 원산 일대로 함대를 출정시켰고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프랑스군은 자국민 선교사들이 살해당한 병인박해를 빌미로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당시 조선조정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의 개항까지 이어졌다. 결국 우리의 운명을 바꿔놓은 개화기는, 수천년 전부터 이어진 고래잡이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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