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가죽잉어) 35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가죽잉어) 35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3.24 09:00
  • 최종수정 2020.03.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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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잉어의 탄생

[헬스컨슈머]이스라엘이 건국되기 30여 년 전인 1910년대부터 유대인들은 가나안으로 몰려들었다. 주로 러시아와 동구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겨울 우기에 내린 빗물이 고여 있는 저지대에 모여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습한 곳에는 당연히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다. 그 습지에서 서식한 모기들이 옮긴 말라리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모기를 피해 1920년대 구릉지대 꼭대기로 촌락을 옮겼다. 현대 과학기술에게는 코웃음칠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물이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에 있는 물을 파이프로 끌어올려 산꼭대기에 서 식수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귀한 물을 사람만 먹고 살 수도 없었다. 농사지을 농업용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물을 최대한 아껴 농사지어야 했다.

 

[유대인의 새로운 시도, 점적관개]

그래서 유대인들은 효율적으로 농작물에 물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물을 작물 위에 뿌리는 대신 파이프를 이용해 뿌리 근처에 정확하게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방식이 탄생했다.

유대인들은 농작물 뿌리 부근에 땅 속으로 고무호스를 연결해 물이 다른 데로 새어나가지 않고 정확히 뿌리에 흡수되도록 하는 관개시스템을 고안해냈다. 바로 땅속에 파이프를 묻어 일정한 시간마다 물방울을 똑똑 떨어트리는 시스템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식물뿌리에 필요한 만큼의 물만 공급하는 점적관개(Drip Irrigation) 기술이다. 이 기술은 물을 40%만 소모하고 생산량은 50% 증가시키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새로운 문제, 녹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호수의 물만으로는 사람과 농작물을 적시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해수담수화 기술을 개발했다. 그리고 지하 221m에서 퍼 올린 물과 담수화 과정에서 끌어올린 바닷물을 사막 어느 암반층에 함께 저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다시 비상이 걸렸다. 식수로 쓸 물에 녹조가 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궁리 끝에 이 녹조를 먹고 자랄 수 있는 먹성 좋은 물고기를 투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에 섭씨 38도의 사막 온수, 민물과 해수 중간 염도의 물속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라는건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 향어의 모습,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살아있는 이스라엘 가죽잉어의 모습,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해결책, 없어서 만들어버린 ‘잉어’]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없으면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독일인들이 오랫동안 개량해 비교적 높은 수온에서도 견뎌내며, 얕은 바닷물에서도 서식할 수 있는, 생태적응력이 뛰어나면서도 식물성 퇴적물을 선호하는 독일의 가죽잉어에 주목했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독일 가죽잉어와 ‘먹성 좋고 덩치 큰’ 이스라엘 토착잉어를 교배시켜 생명력이 강한 새로운 품종을 개량해냈다. 이 잉어는 이스라엘에서 개량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잉어’라 불렸다.

원래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단백질 공급용으로 잉어를 양식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독일 수도사들은 비늘을 쉽게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늘이 없는 잉어만을 골라 오랜 세월에 걸쳐 품종 개량한 것이 독일 가죽잉어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잉어를 식용으로 먹기 위해 가죽잉어를 다시 거꾸로 비늘이 있는 품종으로 개량했다. 유대인 율법의 정결법인 ‘코셔’에 의하면, 비늘 없는 생선은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가죽잉어와는 달리, 이스라엘 잉어는 등지느러미 아래 부분에 큰 비늘이 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에 들어온 가죽잉어, ‘향어’라는 이름을 받다]

이렇게 품종개량된 이스라엘 잉어는 전후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인 1973년 당시, 우리나라는 이스라엘 농무성을 통해 치어 1천 마리를 들여왔다. 그 뒤 양식에 성공해 1978년부터 소양호 등 전국 호수에서 대대적인 가두리 양식이 시작됐다. 우리 양식업자들은 민물고기임에도 비린내가 없고, 독특한 향이 나는 물고기 맛을 선전하기 위해 이를 특히 ‘향어’라 불렀다.

이 잉어는 1990년대 후반까지 내수면 양식으로 각광받아 왔고, 공급이 많은 만큼 유료낚시터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7년부터는 수질보호를 위해 호수의 가두리 양식장이 사라지면서 향어 양식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수면 양식은 바다 양식보다 초기 투자비가 적게 들뿐 아니라 향어의 성장속도는 먹성이 좋다보니 일반 잉어보다 성장이 2~2.5배 빨라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오늘날엔 가두리 양식이 아닌 논에 지하수를 채워 만든 양식장에서 키우고 있다.

2018년 우리나라 향어 생산량은 1천600톤 정도였고 중국산도 많이 수입되고 있다. 2018년 국립수산과학원은 일반 향어보다 성장속도가 약 40% 빠른 육종향어를 개발해 양식업계에 보급했다. 향어 치어를 17개월간 키웠을 때 일반 향어는 몸무게가 1.8㎏이었으나 새로 개발한 향어는 2.5㎏에 달했다.

향어는 2018년 기준 국내 내수면 양식 산업에서 뱀장어, 메기, 송어, 붕어에 이어 5번째로 생산량이 많다. 육질이 탄력 있고 식감이 좋아 횟감으로 인기가 높다. 게다가 값도 착하다. 국내산이 1kg에 6000원 내외이다. 매운탕도 잔가시가 없으며, 살이 푸짐해, 국물 맛이 달콤하면서도 진하다.

유대인이 먹고살고자 개량해낸 ‘가죽잉어’가 머나먼 우리나라로 넘어와 ‘향어’란 이름으로 다시 우리를 살찌우니, 참으로 독특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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