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로마제국) 19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로마제국) 19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12.03 09:00
  • 최종수정 2019.11.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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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만든 도시 로마 - 모든 길은 로마로

[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탄탄한 경제적 기반, 소금]

찬란한 영광과 유럽 문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를 겸비한 것, 동방에 중국 제국이 있다면 서방에는 로마 제국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로마의 출발은 기원전 8세기 조그만 어촌에서 소금 거래를 하던 몇몇 소금 장사꾼들이 테베레 강 언덕에 세운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이렇게 작은 도시국가가 대제국으로 발전한 이유 중 하나가 소금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소금을 만드는 해안가 염전과 소금을 운반하는 소금길이 로마 부흥의 비결이었다.

실제로 유럽 최초의 인공 해안염전 역시도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로마 근교 티베르 강 하구에 건설됐다. 깎아지른 절벽투성이인 지중해 해변에는 염전으로 쓸만한 갯벌이 드물었다. 게다가 소금을 만들기에는 날씨가 영 받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바다소금의 대체재인 육지 소금을 구해서 썼다.

당시 북유럽 내륙지방의 육지 소금인 염호(호수 소금)나 암염(암반 소금)은 생산비도 높았지만 특히 운송비가 비쌌다. 조금 먼 지방이다 하면 소금값의 3/4가 운송비로 나갈 정도였다. 게다가 오는 동안에 통행세, 관세 등은 또 별개였다. 따라서 그 무렵 소금은 생필품이자 동시에 대단히 비싼 귀중품이었다.

로마인들은 금값에 버금가는 소금을 ‘신들의 선물’이라 불렀다. 이렇듯 큰 이문이 남는 소금 무역은 장기간의 내륙운송이 큰 문제였다. 그런데 티베르 강 하구의 소금은 하천을 통해 바로 로마 시내로 운반되었다. 덕분에 로마는 출발부터 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다.

기원전 640년, 로마인들은 로마 인근 항구도시 오스티아에 대규모 제염소를 건설했다. 대량생산된 소금은 하천을 통해 배로 운반되었는데, 대량생산과 하천 물류 덕에 품질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이로써 로마는 중요한 소금 유통의 중심지가 되어 소금을 대륙으로 수출했다. 질 좋은 소금의 소문이 나자 유럽 대륙 각지에서 소금 장사꾼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의 왕래가 많아 자연스레 이를 운송하는 길이 발달했다.

이미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소금 운반을 위하여 로마로 통하는 길이 다 닦여졌다. 특히 북유럽의 호박, 모피, 노예와 교환되던 소금이 운반되던 길을 소금길(비아 살라리아, via salaraia)'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이 길들이 로마 군사들의 원거리 교통로로 이용되어 로마제국 부흥의 기반이 되었다. 훗날 로마가 부강해져 로마 인구가 200만 명에 다다르면서 이 소금 길로 운송된 소금 유통량만도 연 만 톤이 넘었다. 지금도 로마 근교에 가면 소금길(Via salaria)이란 도로가 있다.

소금 생산에는 많은 땔감이 필요했다. 로마인들은 오스티아 제염소에 땔감을 공급하기 위해 삼림을 남벌했다. 비가 오자 산림남벌로 인한 토양 침식으로 테베레 강의 퇴적물이 쌓여 강어귀 삼각주의 확장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수세기가 흐르자 오스티아 제염소는 해안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어 제염소를 해안에 다시 지어야 했다. 그 시대의 환경오염으로 인한 대량이주인 셈이니, 여러모로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소금길이라는 탁월한 투자]

무거운 소금을 나르는 상인들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있었다. 첫째는 포장이 안 된 불편한 도로였고, 다른 하나는 도적들의 공격이었다. 지역 영주들은 이런 수요에 응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우선 길을 편편하게 잘 닦아 마차가 불편 없이 왕래하게 해주었고, 또 영주의 기사들이 안전을 책임져 주었다. 물론 공짜는 없는 법, 상인들은 영주에게 통과세를 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소금길 세금’이다.

이런 조치들 덕택에 영주와 도시들은 앉아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이를 목도한 다른 영주들은 서둘러 소금길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소금길 통행세를 거두었다. 덕분에 오래지 않아 이러한 소금길이 전 유럽 대륙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소금 장사들이 소금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가자 너도나도 이 돈벌이에 뛰어 들었다. 이를 눈여겨 본 귀족들이 동참하였고, 나중엔 수도원들이 장사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 뒤 소금길만 운영히던 도시들이 이젠 소금 무역에 직접 참가하자 시의 재정은 점점 불어났다. 이것은 이후 정부가 소금을 독점하는 소금 전매제도로 자리 잡게 된다.

 

[모든 길을 로마로, 소금길]

이런 귀한 소금을 로마인들이 해안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기 시작하자 소금 교역이 꽃 피웠다. 소금은 북유럽의 호박, 모피, 노예와 교환되었다. 또 사용가치가 높은 귀중한 교역품이었던 만큼, 적에게 소금을 판매한 것이 적발된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 황제들은 인기 유지를 위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소금을 무상으로 배급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국가의 전매사업인 소금 수출이 늘어나면서 로마는 자연스럽게 부강해졌다. 나라가 잘 살게 되자 인구가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만든 소금은 이탈리아 반도를 횡단하여 로마를 경유한 뒤 내륙 각지로 운반되었다. 소금의 수요는 미지의 대륙은 물론 대양을 가로지르고 사막 길을 개척하여 무역로를 닦았다. 결국 "모든 길은 로마로 통 한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소금길에서 유래한 것이다.

루마니아의 소금 광산,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루마니아의 소금 광산,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로마의 전략물자, 소금]

그 뒤 켈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켈트족의 농업, 소금, 철, 승마술 같은 것들을 바탕으로 부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소금의 경제적 가치에 일찍부터 눈을 떴기 때문에 영토 확장과 더불어 다른 나라의 소금 산지도 손에 넣었다.

2세기 로마의 트라이아누스 황제는 소금과 금을 얻기 위해 다치아인이 살고 있던 땅을 정벌해 유럽에서 가장 큰 암염광산을 획득했다. 이후 이 땅은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루마니아로 불렸다. 또 해안과 습지, 소금연못 부근에 수많은 제염소를 건설했다. 얕은 연못에 바닷물을 가두거나, 항아리에 바닷물을 넣고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다.

로마 초기에는 소금이 귀해 화폐의 역할을 했다. 관리나 군인에게 주는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하였다. 이를 `살라리움(salarium; 라틴어로 소금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 뒤 로마 제정시대때부터 급료를 돈으로 지급했지만, 이를 여전히 살라리움이라 불렀다. 봉급을 샐러리라 하고 봉급생활자를 일컫는 샐러리맨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참고로 'soldier(병사)' 'salad(샐러드)' 등도 모두 라틴어 'sal(소금)'에 어원을 두고 있다. 채소를 소금에 절인다는 뜻에서 'salad(샐러드)' 역시도 salada(salted, 소금에 절인)에서 나왔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 사람을 ‘salax’라 불렀다. 사랑에 취해 채소를 소금에 절인 것처럼 흐물흐물해졌기 때문이라나.

이렇게 로마 제국의 부흥은 소금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1세기경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염전을 상실한 로마는,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흑해에서 소금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후 중요한 부의 근원을 상실한 로마의 경제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제국의 흥망은 모두 소금에 출발한 셈이니,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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