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베네치아 下편) 21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베네치아 下편) 21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19.12.12 09:00
  • 최종수정 2019.12.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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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컨슈머]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하루 3끼로 계산하고, 365일의 1년을 80번정도 반복하게 된다손치면 벌써 87,600끼니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이들 접하게 되는 이 녀석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밥상머리에서 말해주기 좋은 지식, 이것이 바로 '어른의 교양 이야기'다. 교양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신성로마제국을 물리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은 호전적인 군주였다. 그는 베네치아에게 비잔틴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의 지배 아래로 돌아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무역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형식상의 지배로 만족하고 있는 비잔틴제국 쪽이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피핀은 강경책으로 나와, 전함을 건조해 베네치아를 침공했다. 규모 면에서 열세였던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의 전함을 내부 깊숙한 곳으로 유인한 뒤, 뱃길을 알려주기 위해 바다 속 여기저기에 세워 두었던 말뚝을 신속하게 뽑아버렸다.

늪지대이므로 밀물 때라도 어지간히 숙련된 뱃사람이 아니면 뱃길을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썰물이 되자 프랑크 전함들은 금방 얕은 곳에 걸려버렸다. 베네치아는 이런 방법으로 프랑크 전함들을 바닥이 얕은 곳에 좌초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이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전함을 향해 밑바닥이 평평한 거룻배를 타고 쳐들어가 불화살을 쏘는 화공을 펼쳐 승리했다.

1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마뉴와 비잔틴제국 황제 사이에 조인된 조약에 의해 샤를마뉴는 베네치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이를 계기로 베네치아는 신성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 양쪽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인정받았고 신성로마제국과의 교역도 활성화되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베네치아인들의 자긍심, 산마르코 대성당의 탄생]

오늘날 베네치아를 방문하면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산마르코 대성당을 볼 수 있다. 산마르코 성당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마르코 성인, 즉 성경의 ‘마가복음’을 작성한 사도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성당이다. 원래 마르코 성인의 유해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의 발호로 알렉산드리아가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성인의 유골조차 지키기가 힘들어졌다. 이때 베네치아 상인이 거액의 돈으로 성인의 유골을 사서 베네치아로 모셔온 것이다.

828년 성인의 유골이 베네치아에 도착하자 시민들은 열광했다.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마르코와 같은 위대한 성인을 베네치아기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신다는 뜻은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역사에는 이날 온 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기록되었다. 그들은 그간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던 테오도로 성인을 제 2석으로 물러나게 하고 마르코 성인을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추대하고 성인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대성당을 건축했다. 이것이 바로 베네치아의 상징이라는 산마르코 대성당이다.

 

[안정된 정치체제를 바탕으로 유럽 최강의 도시국가로]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산마르코 대성당을 지은 후 베네치아는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0세기경부터 베네치아는 바다 건너 아드리아 해적들을 소탕하고 그곳 달마티아에 첫 식민지를 개척해 아드리아 해안가 염전에서 만든 천일염을 알프스 지역에 대량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멀리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이탈리아 동부해안과 동지중해에 안전한 항로를 위한 거점 확보에 최우선 정책을 두어 해양강국으로의 행보에 우선을 두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들에게는 소금을 절반 가격에 파는 가격 차별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로마가 썼던 수법이었다.

당시 소금을 팔아 유대인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은 한 필당 금 한 덩어리에 거래되었다. 이렇게 동방무역이 번성하자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은 유럽 대륙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을 불러들였다. 유대인들이 베네치아에 몰려들면서 무역업 이외에도 모직물, 유리제품, 가죽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독일 광산의 은이 유입되었고 이 길을 따라 동방 물건이 북유럽으로 전해졌다.

10세기 말 베네치아는 중개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했다. 13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는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서면서 선박 3,300척과 3만 6000명의 선원 겸 수병을 갖는 해양강국이 되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백향목 말뚝이 떡갈나무로 대치되다]

백향목은 솔로몬 왕 시절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민들 때 쓰였던 썩지 않는 최고급목재다. 처음에 베네치아 사람들은 백향목을 수입해서 인공섬을 만들었으나 그 많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후 베네치아 사람들은 지상에서 물 묻은 나무는 잘 썩지만 물속 갯벌에 나무를 박아 넣어 공기와의 접촉이 없게 되면 곰팡이나 벌레가 끼지 않아 나무가 썩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식민지인 슬로베키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지의 아드리아 연안 숲에서 떡갈나무를 가져다 말뚝으로 사용했다.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성당을 지을 때 이런 말뚝 110만 개를 갯벌에 박아 그 위에 지었다. 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기초를 만드는 데에만 무려 2년 2개월이 걸렸다.

주민들은 인공 섬들 사이로 배가 다닐 수로를 파서 이 운하들이 도로 역할을 하게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인공 섬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자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410개를 놓아 주민들이 이 섬 저 섬으로 왕래할 수 있게 했다.

 

[소금 독점 전쟁]

소금으로 거대한 부를 일군 베네치아는 그만큼 소금의 중요성을 일찍 깨우쳤다. 그들은 소금채취 경쟁 상대들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후에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들에게 독점적 계약을 강요하는가 하면, 13세기에는 소금세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 덕에, 염전이 있는 곳에서는 소금의 독점권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실제로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 확보를 위해 120년 동안 으르렁거린 기록이 있다.

무역과 해상활동의 강력한 라이벌인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1250년부터 약 120년간에 걸쳐 4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승패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결국 1380년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지중해 소금의 독점권을 두고 다시 맞붙었고, 승리한 베네치아는 이후 100년간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럽 최대의 도시로 등극한 베네치아]

14~15세기, 베네치아의 부의 원천이였던 베네치아 해안의 해수면이 올라와 자체적인 소금생산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러자 베네치아는 주변 아드리아 연안과 키프로스 및 북부 아프리카의 소금을 독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베네치아는 이를 꾸준히 유럽과 동방에 내다 팔고 동방무역도 독점하여 중세 유럽 최강 나라 중 하나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그 무렵 베네치아는 인구 20만 명으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중세에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와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저지대가 포함되는 플랑드르 지역이다. 이 지역들이 중세에 유대인들에 의해 상공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지역이 유럽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십자군 전쟁 때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했다. 이후 제노바와 피사의 기독교 상인들은 영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꺼리지 않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종교적 적대자인 이슬람교도들과 상거래를 하지 않았다. 이 틈에 유대인들은 어부지리를 얻어 계속 동방무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상이 베네치아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현재 베네치아는 지면의 침강현상으로 인한 잦은 홍수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이 아름다운 도시를 지켜내기 위해 다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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