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와인 앱) 44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와인 앱) 44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6.09 09:00
  • 최종수정 2020.06.0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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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이 연 와인 패러다임 3.0, 소비자 주권시대

[헬스컨슈머]유럽인들은 식사 때 대부분 와인을 곁들인다. 와인은 다른 술과는 달리 제조과정에서 물이 전혀 첨가되지 않으면서도 알코올 도수가 비교적 약하고, 유기산, 무기질 등의 포도 성분이 그대로 살아 있는 술이다. 와인은 알칼리성이라 우리 몸의 산성체질을 중화시켜 주는 효능뿐 아니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심혈관 질환을 줄여준다.

더구나 유럽인들에게 와인은 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거기에는 담소 속에 피어나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그 위에 싹트는 우정과 사랑이 있다. 그리고 담소 속에는 온갖 문학과 역사, 철학 등 많은 인문학적인 이야기들이 함께 하곤 한다.

와인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항상 와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와인의 맛은 물론 향기, 색상과 더불어 와인 고유의 온갖 성분이 그들의 찬양과 평가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와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 그 주도세력은 와인제조업자들이었다. 그렇다보니 과거 와인 세계의 갑(甲)은 항상 생산자들이었다. 그들이 와인에 대한 전통 확립은 물론 평가와 가격을 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와인 패러다임 1.0: 생산자 주권시대]

인류는 고대로부터 와인을 먹었지만, 중세시대 수도원들이 체계적으로 와인제조법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와인이 단순 식품 이상의 고가 상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린 해에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박람회 참가자들이 좋은 와인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샤토(와인 양조장)에 등급을 매기도록 했다.

이 칙령을 받은 보르도상공회의소는 58개 샤토의 레드와인을 5개의 등급으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1등급은 4개, 2등급은 12개, 3등급은 14개, 4등급은 11개, 5등급은 17개였다. 이때 1등급 곧 ‘프리미에르 그랑 크뤼’로 채택된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샤토 라피트 로쉴드’(Chateau Lafite Rothschild), ‘샤토 마고’(Chateau Margaux), ‘샤토 오브리옹’(Chateau Haut-Brion)이 1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보르도 지방 최고급 와인들로 인정받고 있다.

내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다, 샤토 무통 로쉴드

이 등급체계는 예상 밖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후 이 아성에 도전하여 성공한 와인은 1973년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상향된 ‘샤토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 Rothschild)뿐이다. 당대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와인 레벨에 넣기로 유명한 무통은 1973년 피카소의 작품을 레벨에 넣고 '1973년에 1등급이 되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사실상 등급제도 내부에서 혁명에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기득권의 우월함', 테르와

이 와이너리들은 자신들 와인의 우월성을 결정짓는 요소로 무엇보다도 ‘테르와’(Terroir)를 꼽았다. 테르와는 원래 땅이라는 뜻이나 그 지역의 토지, 기후, 바람 등의 고유한 환경조건을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와인 생산자의 역할은 오로지 이 테르와 조건에 충실하게 재배하여 최대한 테르와 맛을 살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한번 좋은 테르와를 갖게 되면 그걸로 장땡이었고, 앞으로도 쭉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는 원리였다. 물론 테르와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혁신과 발전이 낄 틈은 별로 없었다. 1등급 그랑 크뤼 와이너리들은 와인에 높은 가격대를 붙여도 잘만 팔려나갔고, 구매자들은 와이너리 명성 하나 때문에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했다. 반면 등급에 끼지 못한 와이너리들은 아무리 특출한 와인을 만들어내도 등급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다. 이와 같이 와인시장이 명성 위주로 돌아가는 것은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이웃나라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계급사회 같았다.

 

[와인 패러다임 2.0: 평론가 주권시대]

그런데 이러한 전통을 중시하는 와인시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8년부터이다. 미국인 변호사 로버트 파커가 ‘와인 애드버컷’(Wine Advocate)이라는 와인잡지의 전신인 ‘와인뉴스레터’를 보내면서 와인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알기 쉬운 점수제에 환호했다. 미국인들에게 100점 만점 제도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는 와인 역사에 있어 혁명이나 진배없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그 어려운 ‘바디감이 어떻고’, ‘산도가 어떻고’, ‘타닌이 어떻고’ 등등, 이런 용어들을 몰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복잡 미묘한 포도주의 맛과 향기와 색상 등을 점수로 계량화하여 쉽게 알려주니 소비자들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로버트 파커, 사진제공: 홍익희
로버트 파커, 사진제공: 홍익희

로버트 파커의 등장

그 뒤 미국에서 와인 소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와인에 대한 평가 주체는 유럽의 와인 생산자들로부터 ‘로버트 파커’ 등 와인 평가자들에게로 넘어왔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불세출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였다. 그가 한해에 맛보는 와인이 만 병이 넘는다. 그의 평가 점수, 평론 한 구절에 와인회사가 흥하고 망한다. 세계 와인 제조사들이 오죽하면 로버트 파커 방식으로 와인 맛을 맞추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심지어 그의 코 후각 기능의 보험금은 백만 달러에 이른다.

1947년 미국 매릴랜드주에서 태어난 파커는 제대로 된 와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일찍이 법학박사를 딴 변호사다. 학생시절 현재 아내이자 당시 여자 친구였던 파트리시아(Patricia)가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 알사스(Alsace) 지방을 방문하면서 와인의 맛에 빠지게 된다. 와인에 대한 열정은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되어 1978년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추천하는 뉴스레터를 2달에 한번씩 만들어 발송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와인 애드버컷’(Wine Advocate) 잡지의 시작이다. 당시에도 와인 평론가들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평론가들은 와인수입과 판매를 함께 병행하고 있어 자신들이 판매하는 와인을 높게 평가하는 등 객관성이 별로 없었다. 로버트 파커는 이를 문제로 보아 와인 판매 일을 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힘들어? 그럼 그냥 점수를 보자!

로버트 파커가 대중들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와인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와인 점수를 학교에서 시험 채점하듯 100점 만점으로 서열을 매긴 사람은 파커가 처음이었다. 와인의 맛, 향, 비주얼, 역사 등의 특징과 개성들이 모두 다르고, 사람의 취향도 모두 다른데 어떻게 숫자 하나로 매길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것이 소비자들에게 통했다. 소비자들은 와인을 잘 알지 못하고,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전문가가 점수로 명확히 알려주는 게 너무 좋았다. 80점, 90점대 와인들만 놓고 비교하니 간편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또한 파커가 중시한 것은 철저한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었다. 이는 와인을 마실 때 어느 지역의 와인인지만 알고, 구체적으로 어느 와이너리의 어느 브랜드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맛을 보았다. 따라서 기존 등급에 따른 우위를 없애고 철저히 맛으로만 판단했다. 이로써 상위 등급 내 와이너리들의 성적이 안 좋게 나오기도 하고, 들어본 적도 없던 와이너리들이 급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어 와인전문 잡지 ‘Wine Spectator’도 10점 만점의 점수를 매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와인 점수시대가 정착했다.

로버트 파커의 점수 명단의 영향력은 이후 와인 업계를 통째로 뒤흔든다. 와인 제조사들은 더 이상 과거의 명성으로 판매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이름 있는 와이너리도 파커로부터 안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해 와인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파커가 와인 테이스팅에 응해주지 않으면 그 와이너리는 아예 관심 가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평론가의 시대

파커의 영향력을 잘 나타내는 사례는 1982년 보르도 지역 빈티지의 평가였다. 다른 평론가들은 그해의 와인들이 산도가 부족하고 열매가 너무 익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파커가 반대로 매우 훌륭한 빈티지라고 평가하자 해당 해의 와인 값은 폭등했고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1982년 빈티지는 그 전후의 빈티지들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다.

이러한 파커의 영향력에 대응해 전통 있는 와인 지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와이너리들은 두 분류로 나뉘어졌다. 파커의 평가를 수긍하고, 지적받은 단점을 보완하여 파커의 입맛에 맞추려는 와이너리들과, 반대로 파커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한 와이너리들로 나뉘어졌다. 이후 파커의 입맛에 맞추어 와인을 변화시킨 와이너리들은 좋은 점수를 받고 사업적으로도 많이 성장했으나, 양키 평론가의 입맛에 맞추느라 와이너리 고유의 특색을 잃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소비자냐, 평론가냐

파커의 영향력이 갈수록 막대해지자 미셸 롤랑(Michel Rolland)과 같은 와인제조 컨설턴트마저 생겨났다. 미셸 롤랑은 와이너리들이 파커로부터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와인제조에 대한 컨설팅을 해준다. 이는 단순한 와인 품종의 조합에 대한 조언만이 아니라 포도의 수확일자, 숙성에 사용할 효모의 종류, 배럴 통 오크의 종류, 알코올 농도설정 등 다방면으로 지도하며, 더 나아가 최첨단 기기를 이용해 와인에 굉장히 작은 산소 수포를 주입하는 신기술까지 전체과정을 손본다. 미셸 롤랑의 고객사 명단에는 5대륙에 걸쳐 100개가 넘는 와이너리들이 있다.

와인 점수체계가 나온 이후로 와인시장의 주권은 생산자들과 유통업자들로부터 와인평론가들에게로 넘어갔다. 생산자들은 아무리 명성이 높아도 매해 파커가 매기는 와인 점수를 기다리며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통해 생산자들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와인업계가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소비자들도 쉽게 좋은 와인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파커는 와인 업계의 패러다임이 생산자보다 소비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도록 한 일등공신이다. 고전적 전통이 현대 전문가의 혀끝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와인 패러다임 3.0: 소비자 주권시대]

로버트 파커가 처음으로 와인에 점수를 매긴 1978년 이후 약 4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생산자에서 평론가로 이동했던 와인시장 주권이 이제는 소비자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1978년에는 미국의 ‘로버트 파커’가 주도했다면, 오늘날은 덴마크의 ‘하이니 자카리아슨’이 만든 '앱'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와인시장의 시대적 흐름을 살펴보자.

지식의 보편화

앞서 언급했듯, 스마트폰이 보급화 되고 앞서 언급한 ‘하이니 자카리아슨’이 만든 것을 비롯한 와인 전문 앱들이 나오면서 소비자들이 와인을 구매하기가 더 쉬워졌다.

특히 요즘 앱은 스마트폰에서 열고 와인 라벨을 사진 찍으면 자동적으로 그 와인이 어느 지역, 어느 와이너리, 몇 년도 빈티지 와인인지 등도 분석해준다. 뿐만 아니라, 그 와인을 여태까지 마셔본 수많은 유저들의 평점과 아울러 평점매긴 유저들의 수, 그리고 유저들이 남긴 리뷰들을 볼 수 있다. 높은 평점일수록 맛있고, 평점매긴 유저들이 많을수록 신뢰도가 높아진다. 또한 페이스북과 연동되어 나의 페북 친구들이 어느 와인을 좋아하는지, 최근에 어떤 와인을 마셨는지도 볼 수 있고, 서로의 평가에 대해 댓글을 남기면서 교류도 할 수 있다. 기술이 가져온 지식의 보편화가 실현된 것이다.

국내 와인 유튜브 크리에이터 영상, 사진제공: '와미남' 채널
국내 와인 유튜브 크리에이터 영상, 자료제공: '와미남' 채널

평론가가 관심없는 '가성비 와인', 아마추어들은 다 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부담 없는 가격대의 와인들은 전문 평론가 점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앱으로 보면 낮은 가격대 와인들도 거의 다 점수가 있어 많은 훌륭한 아마추어 와인애호가들의 평가를 볼 수 있다. 이로써 와인샵에서 가격과 원산지 정도로 밖에 판단을 못하던 와인들을 쉽게 비교하여, 규모로 검증된 와인을 선택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크게 올려줄 장점이다.

사실 병 라벨에 적혀있는 와인설명은 제조사가 좋게 포장한 글일 수 있고, 와인 평론가들의 평가가 대중의 입맛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평점이 쌓이고 쌓여 1,000명 이상의 평점이 모아지면 매우 정확도 높은 만족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된다. 스마트폰 덕분에 쉽게 대중의 힘을 모아 가치를 생성하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의 좋은 예이다.

이제는 와인 생산자들이 평론가가 아닌 실제 소비자들의 평점에 긴장하며 주권이 소비자에게 넘어오는 시대가 되었다. 반가운 소식이다. 생산자 이름만 보고 와인을 사던 시대에서, 평론가의 점수를 보고 사던 시대를 거쳐, 많은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와인을 고를 수 있는 소비자 중심의 시대가 된 것은 정보화시대의 필연적인 트렌드이다. 이는 동시에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로버트 파커와 하이니 자카리아슨과 같은 개인들이 가져온 혁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특히 유튜브가 활성화된 지금은, 굳이 외국 것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이미 국내에서 많은 우수한 크리에이터들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소비자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앞으로 이와 같은 앱들이 내 기존의 평가들을 분석해서 내 취향에 맞는 맞춤형 와인을 추천해줄 수도 있다. 이렇게 개인 취향들을 앱이 고려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각자의 취향에 맞는 고유한 특색의 와인들이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이로써 평론가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획일화되어가던 와인 맛이 이제는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맞춤형 와인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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