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설탕) 30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 이야기(설탕) 30
  •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유대인 이야기>,<세 종교 이야기> 저자)
  • 기사입력 2020.02.18 09:00
  • 최종수정 2020.02.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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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흑인 노예들의 피눈물

[헬스컨슈머]우리는 가끔 우울할 때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달콤한 맛으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심리학적으로 달콤한 맛은 안정감과 행복감마저 들게 한다. 굳이 달콤함을 찾지 않아도 우리가 접하는 음식 속에는 늘 설탕이 녹아들어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설탕의 이면에는 흑인 노예들의 비극과 세상을 바꾼 인류의 경제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 알고 있는가?

설탕이란 단맛나는 것이 있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왕 때였다. 당시 왕이 인도로 원정을 보낸 네아르쿠스 장군은 갈대 같은 식물 줄기에서 꿀과 비슷한 것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이후 사탕수수는 아랍지역으로 퍼졌다.

그 뒤 8세기경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면서 기온이 높은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서구 최초의 사탕수수가 경작되었다. 이어 15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 이후 아프리카에서도 경작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신대륙 점령과 함께 재배 지역이 중남미로 확산되었다.

 

[설탕산업, 동방에서 신대륙으로]

그 뒤 설탕은 후추와 함께 유럽의 중요한 동방무역 품목이 되었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설탕 교역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이들의 영토 확장으로 사탕수수 재배 지역인 이집트와 키프로스가 점령되면서 유럽으로의 설탕 공급이 끊겼다. 그 뒤 사탕수수 생산은 주로 신대륙에서 이루어져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정제산업이 발달했다.

161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신대륙에 위치한 맨해튼 섬에 뉴암스테르담, 곧 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은 1621년 아메리카 항로만을 담당하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이 서인도회사는 무역과 식민지 활동을 독점 수행하는 특권회사로, 해적질도 서슴지 않는 전쟁기업이었다. 이들은 브라질 북부와 베네수엘라 연안군도 및 기아나를 지배해 무역기지로 삼으면서 모피, 노예, 사탕수수 등을 집중 거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시 포르투갈에서 추방되어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다시 브라질에 대규모로 건너갔다. 이들은 1630년 레시페 등 3개 도시를 거점으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45년 포르투갈이 다시 브라질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자 네덜란드는 1654년 1월 레시페를 포르투갈에 양도했다. 그러자 그 곳에 살던 유대인 1500명이 이번에는 카리브 연안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서인도제도에서 유대인들의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사탕수수 재배가 성장하면서 서인도제도에서 이윤이 남는 장사라는 것을 안 유대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노예를 사와 이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이른바 노예, 담배, 설탕의 삼각무역으로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설탕이 폭증해 유럽이 설탕의 단맛에 빠지게 됐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설탕이 부른 전쟁]

고가의 설탕 교역을 둘러싼 경쟁은 당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강국들 간의 큰 전쟁을 가져오기도 했다. 경제사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항해조례’가 발표되고 나서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22년 동안 세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그 무렵 신대륙 서인도제도의 설탕 무역은 유럽 부(富)의 근원이었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이 있는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 섬은 영국령이었지만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가 교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국적이야 달랐지만, 사탕수수 농장으로 부를 얻은 바베이도스 섬 유대인들은 영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내전에서 영국 왕이 지고 의회파인 크롬웰이 승리해 바베이도스 섬을 오가던 네덜란드 상선 13척이 영국 함대에 나포되자, 네덜란드의 설탕 무역은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1652년 1차 영국-네덜란드전쟁이 선포되었고, 그 뒤 전쟁에서 이긴 영국은 1655년부터 설탕 무역의 종주권을 네덜란드로부터 빼앗았다.

그렇게 바베이도스 사탕수수 농장 유대인들에게 위기가 시작되었다. 사탕수수 즙을 사 주던 네덜란드 상선이 더 이상 오지 않아 스스로 살아나갈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배를 사서 무역에 뛰어 들었다. 사탕수수 농장주에서 더 나아가 직접 선주가 되어 해상무역업자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 덕분에 바베이도스의 유대인들은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서인도제도와 마찬가지로 50여 개의 사탕수수 농장이 있던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격전장이었다. 1667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종식과 함께 영국이 뉴 암스테르담을 얻는 대가로 네덜란드에게 수리남을 양도하는 바람에 그 이후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각축전이 되었다. 거대한 황금 앞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제당산업, 영국으로 옮겨오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하얀 황금’이라 불리던 설탕산업이었다. 정제시설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지만 높은 수익을 올려주는 유럽 최초의 자본주의적 산업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설탕산업을 장악해 주도권이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레 네덜란드의 제당산업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1668년 36개였던 암스테르담의 제당공장 수도 1680년에는 20개로 감소했다. 이후 1720년경부터는 제당산업뿐 아니라 네덜란드 산업계 전체가 심각한 붕괴를 겪었다. 네덜란드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빠져나온 흔적이 경제 영역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설탕은 세계 자본주의 성장과도 깊이 관련된 역사적 작물이다. 또한 유럽인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와 17세기 이후 커피나 홍차 같은 음료 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일찍이 영국에서는 1650년 이후 설탕의 일반화가 시작되어 18세기로 접어들어 설탕 소비가 급증하게 되었다. 영국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이 불과 16세기 초에 500그램이었던 것이 17세기에는 약 2킬로그램, 18세기에는 약 7킬로그램으로 증가한 것을 보면 급속한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1650년에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1750년에는 사치품, 1850년에는 생활필수품이 된 것이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노예무역을 부른, 어쩌면 악마의 물건, 설탕]

이러한 설탕 대중화의 공헌자는 단연 흑인노예들이다. 사탕수수 농사에는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신대륙에 노예무역을 통해 흑인 노예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열대지방에는 계절의 변화가 없어 1년 내내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했다. 사탕수수 농장 노예들이 쉬지 않고 일할 가장 적절하고도 잔인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사탕수수는 다년생 풀이라 새로 씨앗을 심어 경작하지 않는다. 잘라낸 줄기 옆으로 새로운 줄기가 솟아 다시 자라는 식이다. 하지만 지력을 심하게 소모하는 작물인 만큼, 밭을 돌아가면서 심어주는 윤작을 통해 지력 회복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경작지를 계속 바꿔줘야 한다.

중노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확한 후에는 그 단맛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재빨리 즙을 짜 다시 졸여서 정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큰 솥에서 오랫동안 끓여야 하고, 이때 엄청나게 많은 연료가 필요해 주변 지역에서 땔나무를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사탕수수 재배 전 과정에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언제나 대규모의 노예 노동력이 따라야 했다.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재배 역사에서 17세기 중엽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특히 영국의 2차 항해조례로 설탕 등 중요 상품은 영국령끼리만 무역하도록 한 것이 결정타였다. 이 시점 이후 설탕 유통의 판도가 바뀌었고 때맞추어 수요가 급증하면서 아프리카 노예수입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렇게 노예들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바베이도스에서는 1660년대까지 유럽인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이후 흑인노예들이 더 많아졌다. 18세기에는 자메이카가 서인도제도의 으뜸 제당산지로 부상했는데, 1774년 자메이카 국세조사에 따르면 680개소의 경작지에 있는 농장에서 10만 5천명의 흑인 노예와 6만 5천 마리의 말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농장 밖 농지에서도 흑인노예가 4만 명이나 일했다고 하니,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시스템에서는 오로지 규모 중심이다. 그러니 노예무역이 성행할 수밖에 없다. 설탕 외에도 면화, 담배, 커피 등 플랜테이션 농장 재배품목이 늘어나 흑인노예의 수요가 증가했다. 초기에 노예상인들은 고작 2~5파운드에 사들인 노예들을 25~30파운드에 팔아 폭리를 취했다. 노예 값이 말 가격의 1/30에 불과했다. 그 뒤 수요가 늘면서 노예 값은 점차 올라갔다.

유명 밴드 비틀즈의 도시, 영국의 리버풀은 사실 노예무역으로 번성한 곳이다. 노예상들은 리버풀에서 직물이나 총기, 술, 유리구슬 등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 노예와 바꾸고, 그 노예들을 다시 신대륙에 팔아 사탕수수, 담배, 면화, 커피 등을 싣고 유럽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대서양 무역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노예무역을 포함한 삼각무역이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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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끌려온 940만 명의 운명, 노예]

노예무역은 15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9세기 중반까지 400여 년 간 유지되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간 흑인들은 혹독한 노예생활을 했다. 노예무역이 시작된 1451년부터 노예제도가 폐지된 1865년까지 414년간 94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끌려와 노예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이나 유럽 제당공장의 노동자들은 무덥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새벽 3시부터 하루 17시간의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며 혹사당했다. 노예들의 피가 배어 있지 않은 설탕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달콤한 산물 설탕을 악마의 농간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와이가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된 이유]

사탕수수가 하와이에 전해진 것은 1861년 시작된 남북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였다. 사탕수수 재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만 그때는 노예제도 자체를 폐기하기 위해 남북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게다가 남방의 따듯한 섬 하와이의 원주민들은 힘든 사탕수수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50년대에 중국에서 대규모 노동자가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리고 점차 세가 늘어난 이들이 임금인상과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자 하와이 주정부는 1860년대에는 일본인 남성을 모집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필리핀과 한국인을 데려왔다. 노예를 부릴 수 없는 하와이에는 이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하와이에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탄생했다.

신대륙 사탕수수 재배부터 유럽국들의 쟁탈전, 그리고 노예무역까지. 설탕은 아무렇지 않게 당연히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알고 보면 수많은 인류사를 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다. 지금의 우리 음식문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설탕은 옛날에는 세상을 바꾼,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비만의 원흉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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